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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9.




근 1년간 벌였던 소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만년필을 산 일이다. 그리 비싼 건 아니지만 부드러운 촉감이 마음에 든다.


예전에 한동안 검은 플러스펜의 서걱서걱하고 각진 필기감이 마음에 들었고 흔히 쓰는 펜과 다른 모양의 글씨를 만드는 게 좋았다. 하지만 플러스펜이 필기를 하기에 썩 좋은 필기구가 아니기도 하고 자주 펜을 잃어버려 습관이 되진 않았다. 만년필을 사며 필기감이 좋은 여러 모양의 노트들도 함께 구매했고 결과는 기대감을 충족했다. 


이 만족감은 내가 글을 쓰게 만들기 위한 당근이었다. 특정한 상황을 계기로 삼는 것으로 누구나 소비의 이유다. 그렇지만 그이후로 '글을 많이 쓰지 않는다'는 생각에 많이 써야 한다는 압박과 소비 행위가 주는 쾌감이 맞아떨어져 애꿎은 만년필을 산거다. 이후에는 한동안 잘 가지고 놀다가 역시 무언가 시작하지 않고 가방속에서 내 신경을 잡아끄는 중요한 물건이 됐다. 이런 식으로 통기타를 바꾸고, 빔을 사고, 책을 사고, 컴퓨터 키보드를 바꿨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압박은 삶의 목표를 만들어야 한다는 원초적인 위기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창한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자. 이와 어울리지 않지만 돈 쓰는 재미가 상당하단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욕구가 생길 때 참지 않고 돈으로 해결해버리는 소비사회의 맛이 중독적이다. 


부모님은 뻔한 내 벌이를 알기에 걱정을 한다. 독립된 생활이 가능하냐는 것인데 미래에 멱살잡히지만 않는다면 살기 나쁘지 않다. 한 때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살기도 했다. 사고 싶은 것을 참는 것 이상으로 잠과 먹는 것, 삶의 기초를 '금욕'을 테마로 바꾸는 것이다. 부모님은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아직도 내가 자린고비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말한다. 이제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돈을 쓰는 건 욕구를 관리하지 않는 것이며, 금욕은 욕구를 관리하는 것이다. 발현된 욕구는 깊이나 지속성을 갖기 어려워 의미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즉흥적인 감정은 포착되지만 박제되지 않고 기념되지 않는다. 금욕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으로 특정 욕구만을 줄었다 조이기는 어렵다. 전반적인 욕구를 줄이다 보면 삶의 연료가 되는 욕구들 마저도 억누르게 된다. 스스로 만든 한계에 순응하는 길이다. 


욕구 자체에 집중하는 것, 관리하려는 건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삶의 상수로 삶 자체에 내재된 톱니바퀴에 집중하는 것일뿐. 기계의 목적과 사용이 정해지면 부품과 필요한 기술은 개발되도 관리된다. 욕구는 망가짐이 없을 만큰만 닦고 조이면 된다. 삶이란 큰 기계의 이미지를 갖지 못하면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고 이끌린다. 복잡한 설계는 낮은 수준의 기판에 머무를 수 있다. 단순한 기판 설계는 조잡스럽고, 핑계스럽게 된다. 욕구에 따라 소비하는 알고리즘은 단순해서 매력적이지만 단순해서 보잘 것이 없다. 


만년필의 부드러운 촉감은 큰 만족감을 준다. 이 촉감이 소비의 전부였을까. 만년필은 내가 돈을 쓴 다른 물건들과 다를까, 돈을 잡아 먹는 다른 물건들은 이제 차지 아니하면서 이 부드러운 촉감. 이것이 전부여도 좋은 것일까. 단순함이 쌓이면 복잡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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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2.



형이, 형수가 소개팅을 해줬다. 보통의 소개팅 형식은 아니었고 나를 불러 형수의 친한 동생과 함께 할 자리를 만든 것이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이번만 가자 싶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직도 이런 수고를 한다. 




나에겐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형-형수와 친하지 않다는 점, 가족 앞에서 여자를, 낯선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형과 술을 먹어본 적이 없다. 생맥 500을 마신 적도 기억이 안 날만큼 드문 일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형과 친하지 않지만 적대감은 없다. 형을 떠올리면 동정심이 강해 다른 감정이 비집을 틈이 없다. 형과도 왕래가 없는데 형수는 더 멀다. 물론 둘은 나보다 싹싹하고 가족인 나와 친해지기 위해 애를 쓴다. 부모님 집에서 볼 때만 자연스럽게 몇 마디 말을 주고 받고 어색함은 없다. 지금의 거리가 만족스러워 굳이 만든 술자리 같은 건 피하고 싶었지만 한 번은 가야 다음 번 거절할 명분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이벤트에 동참했다. 물론 여자를 소개시켜주기 위함도 있었겠으나 나를 만나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가족들과 있으면 입을 떼지 않는다. 부모님과 있을 땐 안부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긴 대화가 가능하지만 형 가족과 친척들과는 대화가 없다. 명절 때면 집안 일과 심부름을 썩 잘해왔기에 말 수가 적지만 착한 아이로 여겨진다. 형-형수와의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낲선 여자, 나에게 소개시키기 위한 여자까지 있으니 어떤 캐릭터가 어울리는지 갈피를 못 잡았다. 여자는 나보다 몇 살 어렸고 예쁜 외모에 싹싹했다. 형-형수와는 꽤 친한 사이라 많은 대화가 오갔고 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듣는 태도를 취했다. 흥미로운 대화는 없었지만 긴 시간 자리를 옮기며 술을 먹었고 나도 형도 그 여자도 취했다. 술이 오를 수록 말은 늘었지만,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에 비해 많아졌을 뿐이다. 그날 내내 더 많은 말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무슨 말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술에 취해 애교를 피우는 그여자에게 호감이 갔고, 그여자는 나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가족과 관련이 없는, 내 주변 사람들과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겠으나 처음부터 소개팅에 성공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형수의 자랑으로 여자를 소개시킬 목적의 술자리가 있음을 알던 어머니에게 하루이틀 후 전화가와 경과와 나의 마음을 캐묻는 말을 쏟아놓았다.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다. 발가벗겨진다는 그 식상한 표현이 딱 맞았다. 술을 먹던 그 날도 형수는 그여자와 내가 사귈 것을 기정사실, 결혼까지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했다. 이렇게 싹싹하고 애교 있는 여자가 집안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아버지가 특히 더 좋아할 거라는 등등 생각할 생각도 없는 일을 형수는 신나 열심히 말했다. 다른 여자를 데려오면 괴롭히겠다는 말을 수 차례 반복했을 때 불쾌감이 약간 생길 뻔도 했으나 어디서부터 말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몰라 그래,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술을 먹은 그 다음 주 주말 펜션을 잡아 넷이서 놀러가자고 결정했다. 술이 깬 후 흐지부지된 것도 있고 등떠밀리는 모양으로 여자에게 연락을 해 따로 만나자는 말을 건네  없던 일로 만들었다. 그여자의 번호를 받아 놓지 않아 술자리가 있은 후 며칠이 지나 형에게 여자의 번호를 건네 받았다. 연락을 해 인사를 했고, 다음을 기약하고, 그 후 연락은 없었다. 옆에서 지켜봤으면 답답하고 의뭉스럽고, 주선자는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행동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흘러 가족들의 대화에서 그여자는 사라졌고, 형-형수와의 관계는 이전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루하고 조금의 시간을 더 고생한 것치고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남자는 외모면 다 아니냐는 형수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 외의 것도 필요하다는 걸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취미나 비슷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내 말은 진짜이기도, 진짜가 아니기도 하다. 그여자는 나와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가장 최근의 연애 시도는 나와 다른 부류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었는데 모나지 않고, 대다수가 가진 삶의 목적과 구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반 년도 채 되지 않아 난 시들해졌고, 형수가 소개시켜준 그여자와의 관계도 다를 가능성이 없었다. 부모님은 가족이라는 동질성을 강조하고 소중히 여기지만, 마찬가지다. 나는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르다'는 말을 가족에게 꺼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잠깐의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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