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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오징어 게임을 시작으로 한국산 넷플릭스 드라마가 세계를 강타했다. 2022년에도 다양한 작품이 기다리고 있는 바, 어떤 작품이 다시 세계적 주목을 받을 것인지 관심일 쏠렸다. 포문을 연 건 웹툰을 원작으로 한 <지금 우리 학교는>이었다.

 

 

좀비의 생동감에 깜짝

 

킹덤 덕분에 K-좀비라는 말이 생겼는데, 킹덤에 등장한 좀비의 분장과 연기력이 심상치 않았다. 서양에서의 좀비물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아 다양한 변주가 있어 왔다. 유구한 좀비물의 역사에서 보더라도 K-좀비처럼 연기력이 뛰어난 좀비물들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정점을 찍은 듯하다. 이전까지의 좀비는 말 그대로 괴물 그 자체로 포악한 공격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그로테스크한 표현과 인간을 물어 뜯는 '식욕' 행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좀비라는 큰 맥락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는 좀비 연기를 디렉팅하는 파트가  따로 있을 만큼 좀비의 움직임에 목적을 부여했다.

 

 

012
고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K 좀비

 

 

피와 상처로 뒤범벅된 외관, 흉포한 괴성, 일그러진 표정, 뒤틀린 몸짓에 무슨 목적성이 필요하겠나 싶지만 <지금 우리 학교는>의 좀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좀비물에서 좀비를 클로즈업하고 담아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장면들이 지루하거나 똑같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좀비 역할을 맡은 배우가 단순히 괴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때문에 장면마다 다른 느낌을 만들 수 있고, 역할을 자각한 수많은 좀비가 모였을 때 무리를 통제하는 정확한 디렉팅이 있기때문에 훌륭한 구도가 탄생한 것이다. 생동감, 자각이란 단어가 좀비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해낸 건 개개의 좀비들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낯선 배우의 명암

 

<지금 우리 학교는>은 의도적으로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물론 그 전작 오징어게임을 통해 넷플릭스 구독자에게 얼굴을 각인한 배우 이유미나 중견급 조연 배우는 어느 정도 얼굴을 봤다 싶은 인물로 구성됐으나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급 그룹의 배우는 확실히 낯선 느낌을 가진 배우들이었다.

 

 

좋아지겠지.

 

 

물론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여 연기력이 떨어진다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귀남 역을 맡은 배우 유인수의 독특한 카리스마를 제외하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연기는 없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전달하는데, 학생 그룹의 성숙하지 않은 '풋풋함'으로 학교라는 현장감을 살리는 것과 값비싼 주연급 배우가 없다보니 누가 중도 탈락해도 모를 긴장감을 만들 수 있었다. 낯선 마스크와 부족한 연기가 어떤 의미에서 대중이 상상하는 '학생'의 어리숙한 모습을 재현해내는 것이다. 특히 멜로 라인에서 배우들이 감정이입이 잘 안 되다 보니 풋풋함이 더 잘 살았다.

 

 

012
존재감 뿜은 씬스틸러들

 

 

이는 어디까지나 연출 의도이고, 단점도 명확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좀비 연기가 더 좋았다는 거...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물이면서 좌충우돌 어려운 상황을 뚫어가는 청춘드라마 같은 느낌도 있다. 원작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넷플릭스의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학폭으로 대표되는 학내 문제, 이와 얽힌 사회적 문제도 언급하고 있다. 너무 많은 걸 하려다보니 하나하나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겠고, 그러려면 더욱 배우들의 순간 집중력이 필요했다. 과학선생과 그의 가족 얘기를 제외하곤-어려운 상황임에도- 주연 그룹 배우들이 발산하는 어리숙함과 그와 얽힌 희망스런 모습이 극 어딘가에서 '음'의 영역으로 따라다녀야 할 우울, 비관, 절망 등등 부정적인 감정이 드러나기도 전에 해소돼 버렸다. 소리 지르고 우는 단순한 행위로 관객이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것도 하나의 완성된 연기와 고조해나가는 연출로 표현해야 하는데 몰입은 없이 여러 문제를 나열하고 울고 소리지르고 지나가 버렸다.   

 

 

 

옴니버스 오락영화?

 

주연 그룹 배우들의 부족한 연기로 밝음과 어둠의 교차가 모호하다 보니, 보이는 건 액션이었다. 좀비의 생동감과 젊은 배우들의 힘 넘치는 움직임은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요소가 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학교는>은 오락물로서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오징어 게임>처럼 극에서 벌어지는 그 순간을 즐기고, 넷플릭스 글로벌 랭킹 1위를 차지함으로써 <지금 우리 학교는>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좀비물을 좋아하는 나도 재밌게 봤다, 하지만 그게 꼭 높은 작품성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01
아저씨는 왜 거기서... 이 아이는 또 어디로....

 

 

이미 누차 언급됐겠지만, 마치 옴니버스처럼 드라마 내 각각의 이야기는 큰 연결성을 갖지 못한 채 효산시 내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사건을 비추는데 그치고 만다. 주연 그룹의 생존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진행상 등장했던 인물과 사건들은 물에 녹아 사라지듯 존재감을 상실한다. '어른들은 믿지 않아요'라는 대사가 힘을 받기에는 효산시에서 벌어진 각 그룹의 사건이 대사에 담길 여지가 없었던 것(사실 온조역을 맡은 배우 박지후의 전반적인 연기가 아쉬워 맛이 안 살았다). 도대체 노트북을 찾겠다고 출발한 형사 일행과 그에게 구출된 아이의 역할을 무엇이었단 말인가, 시즌2가 나온다면 떡밥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만큼의 비중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다. 국회의원과 귀남이에게 허무하게 죽은 조연급 캐릭터들은 또 뭐였고. 

 

 

012
전사, 탱커, 어쌔신

 

 

좀비물에서는 발암 캐릭터, 발암 장면이 있다, 마치 공식처럼. 나연이라는 캐릭터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보여주곤 허무하게 퇴장한 이후에는 특별하게 발암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았다. 주연 그룹에서 어설픈 휴머니즘으로 돌아가며 발암 짓을 해 스킵하게 만들었지만... 그리고 주연 그룹은 딱히 무기도 무력도 없는데 그 많은 좀비 떼를 물리치고, 먹고 마시지 않아도 날라다니는 젊은 체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걸 요소를 보며 오락영화이면서 비디오 게임과 같은 진행이라고도 생각했다. 각 파트별 미션이 있고, 조건을 클리어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중간중간의 개연성은 중요하지 않고 미션 달성 여부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극 후반부에서 좀비를 때려 잡는 모습을 보며 게임 캐릭터가 레벨업해서 강해졌구나란 생각까지도 받았다. 귀남이는 또 왜 이렇게 죽어주는 건지도....

 

 

아쉬운 점도 있지만, 우리가 OTT에 기대하는 건 킬링타임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학교는>은 넷플릭스에 어울리는 컨셉의 작품이다. 부분부분 스킵하며 몰아보기 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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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군더더기가 없는 작품이다. 장인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고, 클리셰와 문학적 은유-상징이 명확해 답답함을 느낄 만한 부분은 없었다. 긴 러닝타임을 보고 지레 겁먹었지만 불필요한 장면, 대사가 거의 없어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들어내고자 하면 들어낼 수 있는 씬이 있겠으나 시퀀스 전체를 들어낼만한 부분은 없었다. 내 입장에서 단점이라고 짚을 부분은 아니었지만, 대중적 재미와 거리가 멀고 드러내는 설명이 적어 관객이 불만을 토로할 법했다. 좋은 영화지만, 마스터피스라고 하기엔 아쉬움 점이 있다. 




1. '개츠비'에 대한 주목


버닝을 그럴듯하게 해석하려는 시선은 '청년의 분노'에 포커스를 맞춘다. 유아인이 폭발한 건 다른 세계에 사는 '개츠비'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 감독이 현시대를 반영했다는 것이다(그런 평론들 제목만 봤지만). 하지만 빈곤층과 부유층의 대립은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유아인과 스티븐 연이 관객에게 얼굴이 익숙하고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됐다는 게 특별해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의미는 익숙한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이 대립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버닝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틀로 작용하지만, '트리거'는 아니다. 정해진 결말로 가기 위해 포장된 도로쯤 됐을까. 길 위를 걷기만 해선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골인을 하든, 길이 낭떠러지가 되든 마무리가 있어야 한다. 캐릭터를 규정 짓는 빈부의 틀은 다분히 도구적이었으므로 과도한 의미부여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속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영화가 그 '속내'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순 없지만.




2. 돈, 섹스, 순수한 욕망 


버닝 초반의 핵심은 유아인이 섹스를 할 때 지켜봤던 가짜 햇빛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먹고, 보이지 않는 여자와 햇빛을 상상하며 자위하고, 생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려는 여행 모두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본능적인 행위다. '개츠비'를 질투하는 건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돈을 단지 '물질'로만 생각할 수 없다. 생의 질은 돈이 결정하며, 삶의 가치마저도 돈이 결정한다.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생존본능이 돈에 대한 갈망이다. 그건 성욕, 식욕과 다를 바 없다.


유아인이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라진 여자의 집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거짓 욕망들 사이에서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허물을 벗어던질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인간의 극단적 순수함, 피에 잠들어 있던 폭력에 눈을 떳을 때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원작 소설을 봤다면 더욱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겠으나 다른 하루키 소설과 비교했을 때 '욕망'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최근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과거 하루키 소설은 관능적이다. 캐릭터들이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야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다.


감독은 유아인을 의도적으로 멍청하게 그린다. 문성근의 사무실에서 보인 유아인의 행동은 작위적인 모자람이었다. 물들지 않은 '백치'에서 스티븐 연이 준 자극을 받아 각성하는 것, 이게 버닝의 '속내'다. <데미안>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는 느낌이 좀 다르고,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 주인공이 '포식자'로 각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게 표현이 잘 안 됐다. 감독은 유아인의 변화를 집착으로 풀어내며 유아인 외적 요소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서스펜스였겠지만, 유아인에 좀 더 집중했어야 했다. 유아인 내면의 변화를 정밀하게 포착하지 못했고, 굴곡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의 반전을 위해서 아껴둔 것일지 모르지만 버닝은 반전 영화도, 스릴러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온전히 유아인의 본능과 욕망 대한 극적인 드라마여야만 했다.




3. 문명-야만 대립, 제3자들의 갈등


유아인과 스티븐 연은 서로에 대한 관찰자다. 유아인은 어울리지 않는 제3자로 스티븐 연 무리를 관찰한다. 자신들 발 밑에 존재하는 '비닐하우스'를 조롱하고 불태우며 즐거워하는 '개츠비들'. 서슴없이 존재를 무시하고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세계의 '지배자'들을 바라본다 ('파티' 두 시퀀스가 작위적인 반복 연출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영화는 여기서 익숙한 구도를 또 한 가지 사용한다. 도시와 비도시, 문명과 야만. 앞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계급 대립에 해석을 한정시키기 보다는 자주 사용되는 인문학적 도구를 가져다 쓰는 게 영화 버닝에 더 어울린다. 


최근 예술 작품들이 문명보다 자연의 우위를 표현하는 흐름처럼 버닝의 야만은 결국 문명을 찢어 발긴다. 유아인이 또 다른 스티븐 연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봤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열린 의미로 해석하자면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으나). 스티븐 연은 유아인을 바라보는 게 익숙하지만, 유아인은 스티븐 연을 보는 게 낯설다. 캐니와 언캐니는 극과 극이지만 공존한다, 유아인이 낯선 것과 동화되는 게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난 스티븐 연이 태우려고 한 '비닐하우스'가 유아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됐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복잡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탄생했을 텐데.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포식자'로서 동질감을 느낀 다른 그룹의 인간들이 만났을 때의 해체와 생성을 기대했지만, 유아인은 스티븐 연이 자신의 세계에 불쑥 침입해오자 수동적인 방어에 나설 뿐이다.


영화는 너무 손쉽게 '여성'을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체가능한 상징적 여성을 등장시켜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고리를 만들고, 동창생이 사라진 후에도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고리로 사용한다. 유아인이 동창생에게 드러낸 감정을 어느 시점에선가 내부로 돌려 유아인의 내적 변화에 치중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유아인을 상대하는 스티븐 연도 좀 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졌을 것이다. 무가치, 고립을 상징하는 우물만으로는 캐릭터 심리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다. 우물은 하루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인간의 내면, 내면으로 향하는 통로 정도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영화에서는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관계를 암시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스티븐 연이 캐스팅된 의도가 거기에 있지 않았까 싶다. 스티븐 연은 한국인이지만 이민을 떠난 '외부인'이다. 미국에서도 그는 '외부인'이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제3자'라는 배우의 배경이 사용된 것이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은 사회의 룰을 따르지 않는 인물이다. 허물을 벗기 전 평범함을 상징하는 유아인의 시선에서 그는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 '제3자'다. 외부인이라는 지위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가 영화 내부에서 필요했고, 관객에게도 전달되길 바랐던 게 아닐까. 남한에 살지만 북한 방송이 들리는 경계 위에 서 있던 유아인은 갈등한다. 자신의 세계 밖에 있는 것, 나에게 실존하지 않는 것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이런 흐름은 으레 그렇듯 '파멸한다'는 클리셰로 수렴된다.



00.

영화를 이끄는 3명은 서로에게 모두 외부인이고, 관찰자다. 그래서 이야기가 깊이 들어가질 못한다. 감독의 의도가 관찰에 있었다면 어쩔 수 없기야 하지만. 엔딩에서 유아인의 살인은 급작스럽고 어설펐다. 그런 방식으로 감정을 터트릴 거란 암시가 별로 없었고, 핸드폰 조회하면 바로 잡힐 살인이 방식이 허술했다. 조금 무리하게 열린 결말로 이끈 듯한 느낌도 받았고, 엔딩 장면에서 유아인의 연기도 디렉션이 명확하지 않았다(롱테이크가 대단히 기막히긴 했다). 이래저래 아쉬웠던 점을 지적하게 됐지만, 네거티브 방식의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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