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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9.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

 


  대학 수업에서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카피라이터가 강사로 왔던 적이 있고, 자신이 진행했던 등산복 브랜드의 기획과 아이디어 시안들을 보여준 적이 있다. 다 까먹었지만 아직 기억나는 건, 인쇄광고 시안이었던 것 같은데, 산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명상하는 장미>가 떠오르며 무슨 카피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장미가 바로 해당 브랜드의 등산복을 입은 소비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 마디로 예쁘다, 튄다, '등산복은 기능이다'라는 레토릭 대신 이제 등산복도 디자인, 스타일이 중요하다라는 인식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 아주 유명한 브랜드였는데, 당시 등산복 시장에서 그러한 브랜드 포지셔닝은 아주 적절해보였다. 하지만 브랜드 자체의 파워가 시장을 흔들만큼은 아니었는지, 컨셉은 좋았지만 슬로건이나 카피, 최종 결과물이 별로였는지(사실, 슬로건이랑 최종 결과물은 별로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 집행된 후 별다른 반향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물론 정확한 조사결과를 알 수 없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굳이 그 브랜드가 그러한 포지셔닝과 시장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해도 이미 등산복 시장은 소비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같은 검은색에서, 최근 신상품들은 검은색을 찾기조차 힘들어졌다. 이는 등산을 즐겨하는 주변인들 어깨너머로 틈틈이 홈쇼핑과 구매목록들을 살펴봤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소비의 대상이 된 등산(복)은 더 이상, 누군가 특정 그룹이 즐기는 레포츠, 여가생활이 아니라 누구나 즐기는 취미의 영역이 됐음을 의미한다. 산악인이나 산악회에 속한 이들이 산에 대한 진지한 마음을 갖고 제대로 된 장비와 지식을 갖춘 채 정상에 오르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동네 공원 산책하듯, 뒷산 올라가듯 편하게 즐기는 대국민 취미생활이랄까. 등반대장을 앞세우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지도를 펼쳐가며 줄서서 올라가야 하는 이미지의 등산보다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어울려 산에 올라가는, 꼭 정상을 봐야하는 그런 의무감 없이 나들이처럼 즐기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고려해 옷을 골라 입고, 친목을 다지기 위한, 나들이의 방편의 하나로 등산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쁜 옷, 예쁜 신발을 사서 밖에 나가는 것과 다름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등산하면, 나에겐 뭔가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다. 몇 번 없는 지리산 종주 경험 때문인지, 커다란 배낭과 땀에 쩔은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등산의 목적이 되는 가장 높은 봉우리. 며칠을 걷고, 뻐근함과 거친 호흡에서 말로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단단해진 허벅지와 욱신대는 발도 점점 지워지고, 지니고 갔던 머리 속의 잡념들도 어느 순간부터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걷고 또 걷고 정한 목적지까지 걷는다. 걸으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인위 없이 자연에 동화되며 무념함과 같은 상태에 빠진다. 아마 대부분 이런 상태를 즐기기 위해 '등산'을 하지 않을까 싶다. 멋진 풍경은 사진에 남지만 몸에 새겨지는 기억은 뭔가 털어내는 그 순간들의 가벼움이다. 단지 뚜벅뚜벅 일정하게 목적지를 향해 걷는 감정은 도시에서 느끼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단지, '등산한다.'


  며칠 전 KBS파노라마라는 프로그램에서 등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은 히말라야의 캉첸중가를 오르려는 전문 산악인이었고, 인원의 규모나 장비의 수준이 남달랐다. 우연히 밤 시간에 티비를 돌리다 끝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끝날 때까지 티비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내가 본방으로 본 부분은 캉첸중가 정상에 오르기 위해 가장 고도가 높은 캠프4에서 원정대가 마지막으로 정상을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화면에 담긴 원정대의 모습은 극한의 절박함이 있었고, 정상에 올라야만 한다는 집념에 차있었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쳤고 생명의 선을 넘나 들었지만 결국 정상에 오른다. 제작과정을 알 수 없지만, 환경 탓에 촬영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혹 파노라마 제작팀이 함께 간 것이 아니라 원정대의 기록영상을 편집해 방송을 한 게 아닐까란 생각까지 했다. 그만큼 화면의 모습은 '날것'에 가까웠다. 촬영을 한 카메라도 최대 2대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화면만으로는 만년설에 덮힌 대자연을 느낄 수 없었지만, 대자연에 묻혀 악전고투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히말라야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어렴풋 짐작만 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후반부 내용은 원정대가 정상에 오르고, 정상에 오른 두 명 중 박남수 등반대장이 하산길에 죽음을 맞아 눈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 이미 우기가 시작돼 폭설로 인해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 베이스캠프를 떠나는 원정대의 모습까지만이 담겨 있었다. 폭설과 강풍이 몰아치는 소리, 이미 지쳐 말도 할 수 없고 걷는 것마저 무리스러워 보이는 원정대원 몇몇, 악천후에 결국 시신수습을 하지 못하고 떠나는 원정대의 뒷모습은 몇 뭉텅이로 화면에 담겨 있을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의 그대로 보여줄뿐 현장에서의 인터뷰도 거의 없었다. 나름의 편집이라고 할 수 있었던, 박남수 대장의 죽음 이후, 2011년 박남수 대장이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나슬루 원정길에 나섰던 모습을 짧게 껴넣은 것 말고는 손대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올라갔고, 화면에는 박남수 대장의 시신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신이 여과없이 화면에 담겨 있었다. 여러 각도의 촬영도 없었다. 그저 박남수 대장 시신 옆모습을 덩그러니 담아 두었다. 시체다란 느낌이 많이 들지 않았지만, 티비에서 시신의 모습을 그렇게 여과없이 볼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놀라웠다. 추후 프로그램 전체를 다시 보았을 때 시신이 그렇게 화면에 나와야만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의도적인 연출 없이, 있는 그대로를 담아 내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힘을 느낄 수 있었지만, 사실 제작진이 손을 댈 수 있는 무게와 존재감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인상적인 사실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다시 받아 본 프로그램은 총 45분이 조금 넘는 길이었다. 나중에 찾아 봤지만, 제작진이 원정대를 따라 촬영한 시간이 60여일정도 된다고 한다. 60여일 동안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를 따지 않았을리 없고, 기획의도에 맞는 장면을 촬영하지 않았을리 없지만, 최종편집에서 선택된 장면들은 결국 거의 손 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이야기를 담기 위해 50여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은 터무니 없이 부족했을 것이고, 결국 가장 압도적인 '사실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제작진의 편집을 보아 아마 산악인의 '동료'와 같은 주제를 잡았던 것 같지만 의도치 않는 사고로 인해 등산이라는 것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무엇을 결과물에 담게 된 우연을 맞이했다. 박남수 대장과 정상에 오른 김홍빈 대원은 손가락이 모두 없는, 최악의 조건을 가지고 히말라야를 등정하고 있었다. 그를 아끼고 보조하는 박남수 대장의 모습을 계속 내보내며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자 했지만, 김홍빈만 살아 돌아온 장면에서 그런 동료애조차 잊게 만드는 운명과도 같은, 절대적인, 불가역적인 인간의 생존과 죽음이 나타났다. 


  캠프4에서 출발한 정상공격조는 등반 도중 산소 부족으로 박남수와 김홍빈에게 산소를 모두 건네주고 캠프로 돌아온다. 이미 캠프에서 출발한지 20시간이 지났고, 그 둘이 돌아온 시간은 또 다시 하루정도가 지난 후였다. 멀리서 김홍빈은 서있는 듯, 걸오고 있었다. 한 발자국에 마치 '천발자국'의 무게와 피로가 담긴 모습이었다. 홀로 텐트로 들어온 그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무산소인채로 하산했고 이틀정도를 꼬박 세며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산을 걸었다. 얼굴은 이미 시커멓게 탈대로 타버린 그는, 시체와 다름 없었다. 생의 모든 기운이 빠져 나갔고 그는 거기 살아 있을 뿐이었다. 박남수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며 슬퍼하는 그의 말조차, 시체였다.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 그 상황이 슬픈 상황이었을 뿐 김홍빈은 슬퍼할 기력조차 없었고, 내가 느끼기에 무미건조해보이기까지 했다. 안타까움, 회의, 절망, 슬픔은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고 표현하지 못했다. 거기엔 살아 있음만이 표현돼 있었다. 모든 감정과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기계처럼 정상에 올라갔고, 다시 돌아와 시체처럼 살아 남았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등산'을 발견했다. 간다, 온다. 


  박남수의 시신을 확인하고 수습하러간 대원 역시, 망자를 대하는 태도가 무미건조하다 싶이 평범했다. 그 역시 지칠대로 지쳐 목소리에 감정을 담을 수 없었고, 말에는 억양이 없었다. 화면 역시 기교 없었다. 찍는 것 자체의 힘겨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곳에 있었고, 살았고, 찍었다. 생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모든 이에게 의도는 없었고 기계적인 목적만이 있었다. 간다, 온다. 그리고, 산다.


  


   인간의 힘으로 안 될 일이 없다지만,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일만큼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히말라야의 고봉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지대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의지만으로 죽음의 지대를 지날 수는 없다. 죽음의 지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지점이었다. 물론 원정대장이 그 정도의 지식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자금과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래서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갈 때 가장 필요한 감각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감각은 희망 없이 절망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 김연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그들의 초탈함은 한편으로, 담담함이었다.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었고, 박남수의 죽음은 인간적인 슬픔을 주었지만 등산의 일부였다. 박남수의 죽음을 (나래이션으로)'또 한 명의 산악인이 산이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에서, 혹은 인간이 닿기 어려운 고봉을 오르며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었을까, 사는 것이었을까. 어쨌든 그(들)는 가야했고 정상에 도착했다. 그후 죽음까지도 등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많은 산악인이 하산길에서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누군가는 긴장이 풀려서라고도 하지만, 정상을 밟았다는 짙은 허탈감이 죽음으로 인도한 것은 아닐까. 베이스캠프에서 원정팀의 한 명은 이런 말을 한다. "더 할지 모르겠다. 가슴에 이렇게 사람들을 묻으면서 계속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 어설픈 추측으로, 그는 내년 봄 박남수 대장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화면을 통해 본 산의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삶에서 지우기 쉽지 않을 테니까. 산에 올라야하는 하나의 이유로, 또 그 산에 오를 것이다. 산에 오르는 행위만이 이유이자, 목적이니까.


  프로그램에서 캉첸중가 원정팀은 산에 오르는 이유를, 정상에, 산에 꿈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많은 산악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이카루스의 추락과 비견할 수 있을까. 그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그것을 담담히, 등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김연수는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희망 없는 절망'을 받아들여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캉첸중가 원정팀이 극한의 상황에서 숨길 수 없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절대적인 무기력감과, 역시 '희망 없는 절망'이었다. 이번 캉첸중가 원정팀의 등정 목적은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소설의 배경이 된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원정팀도 88서울올림픽 성공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캉첸중가 원정팀이 순천만박람회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원정길에 나섰다고 생각치 않는다. 일종의, 필요한 이유였다. 그곳에 가기 위한 겉치레 같은. 캉첸중가 원정팀이 말한 꿈과 희망은 순천만박람회의 성공 따위가 아니었다. 그 희망적인 목적을 위해 산을 오르지 않았다. 죽음을 예비하면서까지, 꿈과 희망을 위해 절대적 무기력감이란 필연적 결과를 예비한다는 건 너무나 모순이다. 원정팀은 그곳에 산이 있었기 때문에 갔고, 돌아왔다. 다시 한 달을 가 설산을 넘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았다. 또 다시 누군가는 오를 것이고, 살아 돌아오거나 죽은 채 돌아올 것이다. 


  태양에 가닿기 위한 이카루스의 목적, 어떤 상징을 손에 넣기 위한, 달성하기 위한 목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이처럼 맹목적인 행위가 또 있을까, 그저 산에 오른다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목적. 인간의 생에서 행위에 대해 그렇게 맹목적인 집착은 거의 유일하다. 오직 비견할 수 있는 것 하나라면, 산다는 행위 오직 그것뿐이다. 산다는 행위에 어떤 이유나 여타의 이유 따윈 필요없다. 모든 인간의 절대적인 집착, 모든 여타의 행위를 이유로 만들어 버리는 목적, 그 자체. 캉첸중가 원정팀 캠프4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나의 뇌리에 강하게 번뜩이며 각인된 건 인간의 삶의 그 어느 한 지점이 날것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다. 히말라야 자체도 압도적이지만, 인간의 그 맹목적인 행위는 히말라야마저 포함하는 어떤 절대적이며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죽음까지 일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산다는 행위에 대한 날것이었다. 캉첸중가를 등정한 후 돌아가는 원정팀의 모습은 한 없이 지쳐보였고 무기력해보였다. 그들이 애초에 말한 꿈과 희망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삶은 희망과 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희망 없는 절망이 필요한 이유는, 그게 생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만 등산할 수 있는 곳. 간다, 온다. 산다. 그리고 마침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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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




새벽 두 시가 다 될 시간, 평소 이 시간의 카페는 조용하다. 오늘은 유난히 사람이 많고 산만한 분위기다. 내 옆에 앉은 아이의 엄마들은 이 시간에 보기 드문 사람들이다. 편한 복장으로 화장기 없이 나온 걸로 보아 동네사람들끼리 수다를 떨기 위해 나온 듯하다. 이야기 주제가 그녀들이 누구인지 더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아이들 얘기, 흔히 상상 가능한 아이들 '교육'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슷한 동네에 살면서 비슷한 학교에 다니는, 서로 얼굴을 아는 학부모들일 것이다. 대화의 소재들은 다양하다. 선행학습의 필요성, 국영수 등 주요 과목의 학업 수준, 자녀가 다니는 학교와 담임선생님의 특성, 향후 내신관리법과 진학 전략, 지역 학원들의 평가와 각 종 소문에 대한 검증 등등. 교육과 관련된 거의 모든 세부내용들이 오고갔다. 정보를 나누고, 자식 자랑을 하고, 아이들 미래에 대한 걱정과 희망 섞인 감정을 교환한다. 그녀들의 아이들은 대략 초등학생 후반부, 중학교 초기인 듯하다. 이미 여러 학원을 다니고 있고 내신과 대외활동, 쥬요과목 학습전랙을 매일 수행해야 하는 그 아이들의 나이는 10살 남짓일 것이다. 


이 새벽시간을 누릴 수 있는 건 아침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 있는 이들을 위한 배려와 같다. 오전부터 부지런히 활동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수 없다. 새벽 시간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학부모들도 내일 아침 급하게 처리할 일은 없는가 보다. 오늘은 금요일, 이제는 토요일 새벽이 된 이 시간, 주말이라는 심적 여유를 가질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그녀들은 전업 주부일 것이다. 회사에서 퇴근 후 집안일을 돌봐야하는 우울을 생각하면 새벽시간을 여유로이 즐기는 '어른'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회사에 있는 시간은 가정에 있는 시간을 빼앗기 때문에 회사를 나오면 가정에 붙들릴 수밖에 없게 된다. 


놀랍게도 긴 시간 동안 대화의 주제는 바뀌지 않는다. 더 놀랍게도 대화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나'의 이야기는 경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일 때만 등장한다. 그것 역시 '나'의 이야기로 보기 힘들다. 가정에 있을 그녀의 삶 대부분은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부모의 관심을 받으며 커가는 아이의 성장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녀들의 대화속에 사는 아이들의 삶은 응원하기 어려웠다. 40대 성인이 가진 에너지를 올곧이 10살 남짓한 아이에게 쏟아낸다는 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시선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다. 한 가정내에서 육아와 성장이 서로의 역할이지만 아이와 엄마는 결국 서로 다른 삶을 예비한다. 그 길은 서로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의 선택에 무리하게 개입하면 자율적이어야 할 선택은 자율성을 잃게 된다. 그 훼손당한 선택의 어느 부분에서 '뒤틀림'을 야기한다. '뒤틀림'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후 그걸 떼어내긴 쉽지 않다.


아이 이야기가 아니면 아마도 TV드라마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어제 잠들기전 든 생각은 무엇이었느냐 물으면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아이에 대한 이야기, TV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금지한다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되는 바는 없지만, 별 볼일 없는 이야기보다 더 서글픈 건 아무 할 말도 없는 것일 테다. 그녀의 삶이 변한 건 언제였을까.


싸가지 없거나 짜증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볼 때면 그 아이의 부모가 어떤 인간일지 생각한다. 아이를 키운 어른 속에 큰 공허함이 있다면, 아이들은 그 공허함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게 될까. 공허함이 아이의 마음에 자리할 때 아이들은 그걸 무엇으로 채우려 할까. 나는 어제 잠들기 전 무엇을 생각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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