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131011.



 조선일보는 전례 없는 파격을 행한다. 현직 검찰총장에게 혼외아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사건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었고, 의혹의 당사자인 검찰총장이 취임 6개월 만에 사퇴한다. 예상대로 사건의 진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유전자 검사해서 진상규명하세요. 사퇴하지 말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사퇴의사를 담은 기사가 한 포털사이트의 메인에 걸렸고, 그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다. 댓글만으로는 여론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혼외아들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로 압축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혼외아들의 진위여부를 집요하게 물었기 때문에 다른 쟁점은 부각되지 않았다.


 언론은 언제나 확답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기사도 ‘혼외아들 의혹 제기’였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을 수집-재구성하며 채 전 총장의 혼외아들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인터넷을 켜 검색창에 ‘채동욱’을 검색해보라. 이번 사건의 전말, 혼외아들 존재유무를 다룬 글이 수십, 수백 개 쏟아질 테니까. 다시 언급하지만, 혼외아들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은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서 보게 되는 이미지와 점점 닮아가고 있다. 흔히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폭력적인 사건 – 항공기 충돌, 총기 난사, 테러리스트들의 폭파 등에 대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라고 즐겨 말한다. (수전 손택 저, 이재원 역, 『사진에 관하여』, 이후, 2009. 229쪽)


 


 연예인 김구라씨는 JTBC <썰전>에서 채 전 총장 혼외아들 의혹과 관련해 “현실이 더 센데 누가 드라마를 보겠느냐"는 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이 사건은 진위여부를 떠나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현실판 ‘사랑과 전쟁’이랄까. 혼외아들, 불륜이라는 소재는 깨끗하고 강직한 이미지의 채 전 총장에게 더 큰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소문은 입과 손을 건너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불륜의 대상으로 지목된 임모 여인과 그의 아들은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노출된다. 채 전 총장과 관련됐다 의심 받는 모든 과거 행적이 파헤쳐 진다. 도마 위에 산 채로 올려진 횟감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황이다.


 정보는 과거 어느 시기와 비할 수 없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빠르게 유통-소비된다. 정보의 빠른 흐름에 익숙해진 대중은 ‘진실’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극을 찾아서 보다 더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언론은 대중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쉽게 말해 잘 팔리는 기사를 쓴다. 사실여부를 규명하는 건 중요치 않다. 보도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기에 항상‘의혹’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 놓는다. 언론은 사건이 통제되지 않고 갈등을 야기해 더 많은 기사거리가 발생하기만 바랄뿐이다.


 혼외아들 의혹이 보도된 시점과 관련해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정국전환용’이 아니냐는 것이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이 연일 언론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현직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이 보도되자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이 바뀌었다. 조선일보의 최초 의혹 제기 이후 법무부는 발 빠르게, 역사상 없던, 검찰총장 감찰을 지시했다. 이에 반발한 검찰총장이 사퇴한다. 사안의 크기와 법무부의 대응은 이 사건이 채 전 총장을 ‘찍어내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고, 최근 청와대, 국정원, 법무부가 사전에 준비한 ‘기획사건’이었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검찰 내부에선 혼외아들 의혹 제기를 위해 채 전 총장에 대한 불법사찰이 진행됐을 것이라 추측하고 이와 관련된 사안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 또한 정황적 증거가 대부분이다. 모든 언론은 정론직필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돈 앞에서, 언제나 그랬듯 권력 앞에서 한 없이 나약할 뿐이다. 정론직필은 정론직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는 레토릭이다. 언론을 통해 진실을 알 수 있을 거라 믿는 건 낭만적이다. 온라인이 정보의 바다라지만 전자화된 정보만이 온라인에 존재할 수 있고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정보는-우발적 사건이 아니라면- 대부분 공개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덕적 영역이 독립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물을 판단할 때 인식적 판단(참 거짓), 도덕적 판단(선 악) 그리고 미적 판단이라는 적어도 세 가지의 판단을 동시에 한다. 그것들은 뒤섞여 있어서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렇게 배제할 것을 '명령받는' 것이다. 예컨대 뒤샹의 변기는 미술 전시회에 나와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품으로 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고, 도로에 놓여 있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암묵적으로 '명령'이 존재하는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저, 송태욱 역, 『윤리 21』, 사회평론, 2001. 166쪽)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빌려 사건을 보자면 이렇다. 채 전 총장의 혼외자식 의혹이 제기된 순간부터 사건은 도덕적 판단을 요하는 성격을 갖는다. 정보의 참, 거짓을 판단하기 보다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하려 한다. 여기서 도덕적 판단은 인식적 판단에 우선한다. 법리적으로 무죄추정의 원칙은 사건 조사.판결의 선행조건이며 불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모두 무효처리 된다. 결과적으로 “어쨌든 나쁜 놈이잖아”라는 도덕적 판단이 인식적 판단보다 선행될 경우 공동체는 심각한 갈등 상황을 맞닥뜨리기 때문에 마련한 제도적 장치다.


 요즘 팩트란 말이 유행이다. 채 전 총장 사건에 관심을 갖은 호사가들은 정보를 모아 사건을 재구성한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상수로 다뤄진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재구성된 사건은 팩트가 될 수 없다. 팩트란 단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합리적인 모양새를 취하는 이들 대부분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도구적으로 인식적 판단을 사용한다. 참, 거짓을 가리지 않고 준비된 선, 악을 구분짓기 위해 팩트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은 전제 군주는 노예들을 쇠사슬로 구속할지 모르지만, 참된 정치가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관념의 사슬로 노예들을 구속한다. 정치가가 사슬의 한쪽 끝을 붙잡아 두는 것은 이성이라는 고정된 측면이다. 또한 그 사슬은 우리가 그 구조를 모르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단단히 조여드는 것이다. [J. M. Servan, 『범죄사법 행정에 관한 논설』, 1767, 35면 (미셸 푸코 저,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 2009, 166쪽에서 재인용)]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가 없었다면 정보는 유통되지 않았을 것이며 대중들에게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미디어로서 그 기능을 수행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국가기관이 이번 사건에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정보들로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이다. 그러한 수준의 정보까지 습득할 수 있는 ‘누군가’가 정보를 수집-가공해 조선일보를 통해 유통시킨 것이다. 최초의 정보가 만들어지는 과정, 정보의 원천 등은 조사가 더 진행돼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채 전 총장과 관련된 정보를 만든 이들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에 따라 해석되도록 필요한 정보만을 유통시켰고, 그 결과는 명확하게 나타났다. 정보의 수용자는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해석을 하도록 “암묵적으로 명령”을 받은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은 정보의 민주화를 말하게 한다.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지금도 정보의 원천에 다가가기 어렵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대부분 허락된 정보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력은 완성된 그림을 던지지 않는다. 대중들 스스로 퍼즐을 맞추도록 파편화된 정보를 흩뿌린다. 완성된 그림은 진실이 아니라 권력이 그려 놓은 “관념의 사슬”에 가까울 것이다. 푸코는 현대 사회의 통제 시스템 핵심 중 하나를 피지배계층의 자발적 복종으로 봤다. 사회 시스템의 ‘규율’에 ‘순종’하도록 길들여진 이들에게서 자유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착각할수록 “관념의 사슬”은 이성에 기대어 발목을 더욱 죄어올 것이다.


 

반응형

'옛블로그1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년필  (0) 2018.02.28
소개팅  (0) 2018.02.28
일베_5  (0) 2018.02.28
일베_4  (0) 2018.02.28
일베_3  (0) 2018.02.28
반응형

20130527.



5.



불륜은 결혼한 남녀 간 혼외정사를 일컫는다. 누굴 짝사랑한 걸 가지고 '불륜이야'라고 표현하진 않는다. 그럼 사랑과 전쟁은 19금이 아니었을테다. 불륜이란 단어는 결혼제도를 어기는 것에 대한 표현이지만 불륜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사회적 '제도'를 넘는 것에 있다. 어렸을 적 초인종 벨을 누르고 튀었을 때 느꼈던 감정 중 하나처럼 하지 말라는 짓을 할 때 느끼는 쾌감이다. 그리고 구별이 필요한 건 불륜을 보며 관음증과 같은 쾌감을 얻는 것과 직접 불륜를 하며 얻는 쾌락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옳다 정해진 선을 넘으며 느끼는 쾌감은 전자의, 남의 불륜을 엿보며 즐기는 것과 유사하지만 직접 불륜의 당사자가 됐을 때는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다. 당신의 눈 앞에 지금 매력적인 여성이 있다. 결혼을 했든 애인이 있든 이성에게 '시선'을 빼앗길 가능성이 높다. 시선은 누구나 뺏길 수 있지만, 성적 욕망이든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욕망을 느끼든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와 상상을 하는 경우는 다르다. 직접 성교를 해 얻는 쾌락은 야동을 보며 자위를 하는 쾌락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행위의 주체로서 객체가 돼 주체의 입장을 상상하는 건 미디어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만족을 얻는 행위와 유사하다. 자극적인 컨텐츠일수록 인간에게 잠재된 본능적 욕망을 건드린다, 폭력, 섹스와 같은 기본적이며 가장 파괴적인 내용부터 최근엔 '아빠 어디가'처럼 가족의 관계를, '우리 결혼했어요'처럼 연예-결혼 관계를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이미지로 포장해 소비하게 만든다. 강민경이 면도기 광고를 하며 일본AV를 떠올리게 만든 카메라 워킹으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처럼 중요한 건 보는 이로 하여금 주체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컨텐츠를 만드는 이나 소비하는 이나 둘 다 객체일뿐임을 잘 알지만 둘 다 '주체로 착각하겠다'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컨텐츠를 만들고 소비한다. 


 


우리가 만들어지는 사회적 정체성에 맞는 소비 컨텐츠와 그 이면 숨겨진 욕망에 적절한 컨텐츠가 모두 유통되고 있다. 점점 더 모호해지며 숨겨진 욕구가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된다. 내면 깊이 사라지지 않는 욕망은 돈으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고 있다. 보이진 않지만, 공공연한 비밀 같은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숨기고 있고 돈으로, 혹은 각 자의 방식으로 숨겨둔 욕망을 해결하고 있단 사실을 시선이 닿지 않는 한 구석으로 미뤄 놓는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사실을 '비밀'로 치부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으로 숨긴다. 하지만 뻔하고도 우습게도 주변에서 일상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타인에게 드러낼 수 없는 욕망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행위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미디어, 법률, 통념상의 도덕 등 사회 전반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존재하지 않도록 꾸미고 부정적 의미를 부여해 개인적 욕망을 해소하려는 행위들을 비정상의 범주로 묶어 낸다. 개인의 삶에는 존재하지만 집단은, 사회는 인식에서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거세하려 하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듯 개인은 욕망을 스스로 꽁꽁 숨기기에 이른다. 욕망을 탐하며 사회와 타인의 시선에 동조에 욕망을 밀어 내는 모순 속에서 많은 이들이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은 타인과 얼마나 닮았느냐, 사회가 제시하는 올바른 삶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워지고 있느냐, 이러한 기준들이다. 그러한 집단성에서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삶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공고한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정체성은 개인의 욕망과의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의 해결 방법은 익히 배워왔던 집단성으로의 회귀다. 모두가 갈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갈등의 양상이 비슷하다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비정상으로 비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해소하는 것이다. 꼭꼭 숨겨진 개인의 욕망들은 서로 연결된다. 마치 생존과도 같은 일이다. 과거 정보통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 개인의 커뮤니케이션 범위와 형태는 단순했다. 자신이 실제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 외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몇 년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뮤니케이션의 시공간이 사라졌다. 이들은 더 쉽게 집단을 이뤘고, 더 다양하게, 더 크게 모이기 시작했다. 단지 모니터를 통해 주고 받던 활자는 전기신호를 넘어 일상 깊숙히 스며들어 가상 공간을 통해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음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의 사회가 됐다. 순간순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자제하지 않는다, 감정, 느낌, 상상, 생각 등은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가상의 공간에 기록한다.  많은 이들이 본다, 동의한다, 공감하며 동일한 이야기를 엮고 엮는다. 어느 새 또 다른 주제와 형식을 가진 집단이 모인다.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만큼이나 가상의 공간에서 상상 속의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얘기들이 많았다. 가상 공간의 관계는 왠지 진실된 관계가 아니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그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음을 최근 느낀다. 타인이 맺은 관계의 진실을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어떤 관계든, 관계는 존재하며 그 내용과 형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준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가능한 만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살아간다. 이제 많은 이들이 얼굴을 맞대지 않고 가상의 공간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가고 있다(이 모습이 더 진실된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비언어적(non-verbal) 요소가 언어적(verbal) 요소보다 더 많은 정보는 전달한다고 한다. 가상의 공간에 등장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은 비언어적 요소를 거의 배제하고 있다. 이에 부족함을 느꼈는지 이모티콘, 짤방 등 과거에 없던 형태의 '언어적 요소'들이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때로 나는 가상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편함을 느낀다. 원하는 정보만을 송출하고, 수신하고, 원하는 반응을 얻고 보내고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를 신경 쓸 것 없이 원하는 커뮤니케이션만을 취할 수 있다. 원하는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게 핵심적인 요소다. 원하는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가 된다. 개인이 커뮤니케이션의 대상과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건 개인의 욕망을 원활하게 투영할 수 있는 조건과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보다 가상의 공간이 더 솔직한 공간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 많은 이들이 가상 공간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응형

'옛블로그1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개팅  (0) 2018.02.28
채동욱 사건_정보와 관념의 사슬  (0) 2018.02.28
일베_4  (0) 2018.02.28
일베_3  (0) 2018.02.28
일베_2  (0) 2018.02.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