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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1.



4. 

 

욕망들은 담아두고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 한 구석에 남아 있기 마련이다. 영화나 만화의 권선징악 주요 클리셰 중 하나가 악이 깃든 악역 캐릭터가 마지막 주인공과의 대결 도중 마음 속 어딘가 숨어 있는 착한 마음, 깨끗한 영혼의 존재를 깨닫고 착한 존재로 각성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주인공과 합세해 더 큰 악을 처단한다. 그렇다 우리의 마음 속엔 정말 지울 수 없는 뭔가가 남긴 하는 것이다. 악당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니까 말이다.

 

꽁꽁 숨겨둔 개인의 욕망은 마치 숨겨야 하는 어떤 물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걸 다른 사람들 앞에 꺼내면 안 된다고 배워왔고 그래왔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뭔가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만한, 경멸할만한, 께름칙해할만한 것들을 숨기며 짐짓 얌전한 척 살아야 한다. 야동을 보고, 잘 빠진 여자연애인 노출 건이라도 터지면 바로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잘생긴 아이돌의 눈짓 한 번에 부르르 떨고, '홍등가'는 불야성을 이루고 끓는 청춘 오갈데 없고, 지친 회사원들은 서로의 치부를 주고 받으며 한 배를 탄 동료인냥 불콰해진 얼굴로 어느 여인의 허벅지에 눕고, 도도하게 눈을 흘기며 성적 매력을 가늠하다 부뚜막에 오를 일 없다는 고양이처럼 온순해지는 만상들이. 우리 나라의 섹스시장은 세계에서도 손 꼽히고 한국인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그 맹위를 떨치고 있다. 무엇에 관한 기준인지 모르지만, 여성들의 다이어트는 1년 내내 그치지 않고 이사람이 그사람이었는지 모르게 닮아 가며 뭇남성들을 간질간질인다. 뜻 모를 핑계들을 나누며 가까워질 틈만 노린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았나, 북창동에서 가장 유명한 패거리는 법조인과 교수들이라고. 얌전한 샛님들이 늦게 배운 도둑질 무서운지 모른다고. 돈도 있겠다 나름 남들 무시할만큼 지위도 얻었겠다 술도 먹었겠다, 옛끼 한 번 놀자구나! 엉키고섥히고 들썩들썩 어허야둥둥 이게 다 좋은 세상만난 탓에 이리 신나게 놀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방치된 그 분이 내면에서 튀어나와 신명나게 놀아나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내일이면 저 깊이 어두운 곳에 꼭꼭 숨어야 하는 처지이니 이 때 한 번 놀아야지, 내 돈 내고 내가 놀겠다는데 그 누가 말리겠나. 진짜 나는 원래 풍류를 아는 족속이었나 보다, 내 이리 신명을 내는 걸 보니 나는 원래 이런 놈인가 보다 싶어 한 판 놀고 나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다. 원래 잘 빠진 사회구성원의 하나로, 멀쩡한 사람으로 맡은 바 역할 충실히 하는 건전한 국민의 옷을 입고 겉모습을 손질한다. 욕망을 억누르고 그것을 통제가능한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는 '해방구'가 필요하다. 자본은 그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심하고 집요하게 파고 든다. 많은 이들이 돈을 통해 욕망을 해소한다, 돈의 크기가 곧 해방구의 크기가 된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일찍이 돈을 벌고 있다. 군인시절 부대 근처로 처음 여관말이 갔던 날, 방에 들어왔던 여자에게 미안하고 맘이 울적해 힘든데 그냥 쉬었다 가라고 했다. 그 친구는 동반입대했던 친구와 병장 즈음 외박 나와 노래방에서 도우미들을 불렀던 적도 있었다. 가슴을 주무르려 했더니 왜 이래하며 피하는 도우미를 보고 '내 돈 내고 내가 만진다는데!'라는 일갈 후 거칠게 하던 일을 마저 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그렇다, 돈을 내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친구는 제대 후 일종의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직장동료인 어른들과 주점에가 술 먹고 여자와 자고 노는 '직장인'의 일상이 익숙해졌고, '노는 게' 달라진 친구들은 연락이 뜸해지게 됐다.  

 

여기서 성매매를 이렇다 저렇다 할 건 아니고, 섹스의 욕구를 풀기 위해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기분도 좋고 돈도 좀 있다 싶음 안마방이니 여관말이를 간다. 자신감이 있다 싶으면 나이트에 가서 룸을 잡거나 클럽에 놀러 간다. 여자친구, 있어도 간다. 없을 경우 정도가 좀 더 심할 뿐이다. 술 먹으면 습관적으로 찾는 이들도 몇몇 봤다. 성욕을 풀긴 풀어야 겠는데, 가장 손 쉬운 방법이 돈이다. 돈으로 성욕을 푸는 행위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푸는 게 우선 순위다. 돈이 없으면 꾹 참거나 화, 짜증, 폭령성 등의 감정으로 분출한다. 그러다 야동을 보거나. (한 가지 짚을 게 글을 쓰는 화자는 남자다. 그래서 남자를 중심으로 쓸 수 밖에 없다. 여자의 욕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으로서 사회적으로 형성된 정체성, 그에 맞는 행위,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 그 욕망을 풀기 위한 또는 욕망이 풀려지는 행위의 디테일을 모르기 때문에 남성을 중심으로 적을 수밖에 없음이 아쉽지만 한계다) 


애인을 만들면 된다. 섹스에 대한 욕구, 정서정 안정 같은 걸 얻고 싶으면 이성을 가져야 한다. 그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필요하다. 요즘 유행하는 ASKY를 들어 보았는가. 안 생겨요, 이 표현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이성을 갖고 싶은 욕구를 해결하지 못함을 아주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으며, 또 아주 많은 이들이 이성과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함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성(혹은 동성. 예외적으로 '사물')-대상(OBJECT)을 만나 육체적 관계와 감정을 나누는 건 그냥 해가 뜨고 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러 타인들을 주변에 두고 그들을 만나 다양한 욕구를 풀 수 있다면 굳이 하나의 대상에게 집중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도덕적 기준, 관습, 문화 등의 영향으로 우리에겐 중요한 하나의 대상이 필요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 전제로 삼아 온 명제이기에 내밀한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 들이고 사회적 통념에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왜 불륜 소재가 막장이라 욕먹으면서도 인기 있을까.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간절함과 '옳은 것'을 깨는 일탈, 금기를 넘어서는 뭐 그런 것들. 이와 같은 소재는 시작이 언제부턴지도 모르게 오래된 예술의 테마다. 요즘 시대에 그 소재와 표현이 더 자극적인 건 금기를 탐하는 욕구가 더 커졌음을 의미하고, 사회적 억압이 그만큼 더 커졌음을 의미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시스템이 공고화된 사회에서 시스템이 만든 정체성과 갈등을 빚고 탈출하고 싶은 개인들이 더 많아진 것이다. 뷸륜이 합법이라면 미디어에서 볼 재미를 못 느낄 거다, 각 자 생활에서 '불륜'을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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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3. 


나는 수작을, '가식적으로 꾸미는 일을 낮게 부르는 말'이란 의미로 쓴다. 가식적이라 함은 꿍꿍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기 위해 의식적으로 말과 행동을 에두르거나 거짓을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욕망을 인식하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들 앞에서 보일 연극을 '수작'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당연히 '나'다. 사람들은 삶을 그렇게 수작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각 종 수작들을 배운다. 타인과 어울려야 하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필요한 수작들을 말이다. 질서, (추상적인)법규, 사회적 약속, 예절(禮節), 효(孝), 도덕 같은 문화 혹은 관습이라 부를만한 것들을 몸에 익힌다.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십여년 넘게 일률적인 과정과 평가를 통해 몸과 머리에 입히는 시스템을,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촘촘히 만들어 놨다. 생각-사고하는 과정이라기 보다 배움의 과정이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묻지 않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아주 오랫동안 배운다. 개개인은 내부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기 보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정한 바에 따라 개인의 욕망을 왜, 어떻게 통제해야하는가를 배운다. 매뉴얼이라 부를 법한 과정을 통해 온건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란 이들은 매뉴얼에서 어긋나는 사람이 되길 두려워한다. 정해진 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귀따갑게 들어 내재됐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정해진 선을 넘고 싶은 욕망, 본능에 괴로워 한다. 상상해왔던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공포, 지속적으로 주입 받은 그 일탈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행위를 옭아매지만 인위적으로 인식된 욕망들,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된 욕망들은 개인의 내적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어느 지점에서 내가 사회에 적합한 사람인가, 필요한 인물인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고 그로부터 많은 이들이 존재가치에 회의를 찾아 우울함에 빠진다. 나도 그렇지만 우울하기 위해 존재를 나락으로 떨어 뜨리는 것인지, 나락으로 침잠이 정해진 수순인지 인간의 삶에서 필연인 건지 사람들은 가끔 정적인 상태에 빠지고, 영원히 정적인 상태에 머무르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는 시스템에서 끊임 없이 다루는 용어가 희망, 열정, 인내 같은 것들이다. 이와 반대되는 절망, 우울, 게으름과 같은 단어는 부정적인 것으로 배우며 자란다. 윤동주의 서시는 괴로워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우울과 고뇌가 인내를 거쳐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일원적 메시지로 환원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시로 자리 매김한다. 이렇게 보면, 이 시스템이란 게 진보라는 말과 참 어울린다. 실제 그렇기도 하고. 뭐 여담이고, 정체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배우며 사회적으로 설정한 지향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내적이고 정적인 행위, 상태를 꺼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도덕의 역사까지 들이 댈 깜냥은 없지만, 한 사회의 룰은 인간들이 어울려 살기 위해 하지 말아야할, 통제가 필요한 개인의 욕망과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로 죽이지 말자, 훔치지 말자, 때리지 말자 같은 몇 안 되는 원초적인 금지행위에서 지금 시대는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행위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행위들이 규정된 사회에 이르렀다. 인간은 그처럼 간단한 원칙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가 싶지만, 이젠 하지 말아야할 행위와 더불어 해야만 하는 행위들을 규정한 사회에 이르렀다. 해야 한다길래 하고 있는 행위들은 진짜 해야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 다른 말로 자신이 이 사회에 필요한 이임을 인증하고, 그런 증명으로부터 말미암아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해야만 하는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번식을 위한 교미도,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것도, 자고 싶지만 잠을 잘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며 괴롭지만 이러한 삶의 형태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만 내가 살아온 역사가 부정(不正)되지 않으며 이 역사로부터 파생될 미래 역시 부정당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내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정보를 찾고, 공유하고, 가공하고, 인정 받고 이러한 순환을 통해 규격화된 삶의 빈틈을 채워 간다. 나의 삶과 유사한 역사를 지닌 이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공감함으로써 지향했던 삶의 모습이 괜찮은 선택이었고 지속해도 되겠다는 자존을 갖는다. 이런 자존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집단이 크면 클수록 좋다. 많은 이들이 선택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괜찮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와 유사한 삶을 살고 있고 그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은 집단에 속해 있음으로 정상적인, 온건한 사회구성원이 되었다는 의미다. 삶의 양식뿐만 아니라 가치와 신념 체계를 타인과 유사하게 맞춰가며 사회의 주류-핵심이 되고, 점점 그러한 집단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삶의 형태, 가치체계를 오랜시간 동안 교육 받아 왔다. 개인의 욕망이나 가치, 신념체계를 사회 보편의 것으로 치환시키는 작업을 통해 사회는 예측불가능성을 줄이며 사회의 안정을 유지한다. 사회 안정성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 공포와 혐오를 심어줌으로써 교육시스템의 안정을 꾀하고 동시에 처벌과 낙오의 사례를 끊임없이 만들어 공포와 혐오가 현실이 되도록 만든다. 나 역시 내가 속했던 다양한 집단, 관계들로부터 멀어지는데 큰 고통과 공포를 겪었다.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형성된 나의 자아는 긴 시간동안 내적으로 갈등을 겪게 만들었고 어느 땐가 '섬'까지 떠내려가고 말았다. 학창시절 내내 성실한 모범생이고 착한 아들이었던 나는 욕망을 억누르고, 감정 숨기고, 타인의 시선을 눈치 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맞는 수작 부리는 법을 몸에 체득했다. 마치 몸과 얼굴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나를 바라보며 고통스러웠지만 그 역시 성실하게 억눌렀다. 하지만 썩은 이를 언제까지 참을 순 없다. 썩은 이를 치료하거나 빼버리는 시점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때다. 치과 치료는 무시무시하다, 괜히 치료 받나 생각이 들지만 치료의 흔적이 사라지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조차 일상생활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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