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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




새벽 두 시가 다 될 시간, 평소 이 시간의 카페는 조용하다. 오늘은 유난히 사람이 많고 산만한 분위기다. 내 옆에 앉은 아이의 엄마들은 이 시간에 보기 드문 사람들이다. 편한 복장으로 화장기 없이 나온 걸로 보아 동네사람들끼리 수다를 떨기 위해 나온 듯하다. 이야기 주제가 그녀들이 누구인지 더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아이들 얘기, 흔히 상상 가능한 아이들 '교육'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슷한 동네에 살면서 비슷한 학교에 다니는, 서로 얼굴을 아는 학부모들일 것이다. 대화의 소재들은 다양하다. 선행학습의 필요성, 국영수 등 주요 과목의 학업 수준, 자녀가 다니는 학교와 담임선생님의 특성, 향후 내신관리법과 진학 전략, 지역 학원들의 평가와 각 종 소문에 대한 검증 등등. 교육과 관련된 거의 모든 세부내용들이 오고갔다. 정보를 나누고, 자식 자랑을 하고, 아이들 미래에 대한 걱정과 희망 섞인 감정을 교환한다. 그녀들의 아이들은 대략 초등학생 후반부, 중학교 초기인 듯하다. 이미 여러 학원을 다니고 있고 내신과 대외활동, 쥬요과목 학습전랙을 매일 수행해야 하는 그 아이들의 나이는 10살 남짓일 것이다. 


이 새벽시간을 누릴 수 있는 건 아침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 있는 이들을 위한 배려와 같다. 오전부터 부지런히 활동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수 없다. 새벽 시간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학부모들도 내일 아침 급하게 처리할 일은 없는가 보다. 오늘은 금요일, 이제는 토요일 새벽이 된 이 시간, 주말이라는 심적 여유를 가질 수도 있겠으나 아마도 그녀들은 전업 주부일 것이다. 회사에서 퇴근 후 집안일을 돌봐야하는 우울을 생각하면 새벽시간을 여유로이 즐기는 '어른'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회사에 있는 시간은 가정에 있는 시간을 빼앗기 때문에 회사를 나오면 가정에 붙들릴 수밖에 없게 된다. 


놀랍게도 긴 시간 동안 대화의 주제는 바뀌지 않는다. 더 놀랍게도 대화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나'의 이야기는 경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일 때만 등장한다. 그것 역시 '나'의 이야기로 보기 힘들다. 가정에 있을 그녀의 삶 대부분은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부모의 관심을 받으며 커가는 아이의 성장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녀들의 대화속에 사는 아이들의 삶은 응원하기 어려웠다. 40대 성인이 가진 에너지를 올곧이 10살 남짓한 아이에게 쏟아낸다는 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시선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다. 한 가정내에서 육아와 성장이 서로의 역할이지만 아이와 엄마는 결국 서로 다른 삶을 예비한다. 그 길은 서로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의 선택에 무리하게 개입하면 자율적이어야 할 선택은 자율성을 잃게 된다. 그 훼손당한 선택의 어느 부분에서 '뒤틀림'을 야기한다. '뒤틀림'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후 그걸 떼어내긴 쉽지 않다.


아이 이야기가 아니면 아마도 TV드라마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어제 잠들기전 든 생각은 무엇이었느냐 물으면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아이에 대한 이야기, TV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금지한다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되는 바는 없지만, 별 볼일 없는 이야기보다 더 서글픈 건 아무 할 말도 없는 것일 테다. 그녀의 삶이 변한 건 언제였을까.


싸가지 없거나 짜증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볼 때면 그 아이의 부모가 어떤 인간일지 생각한다. 아이를 키운 어른 속에 큰 공허함이 있다면, 아이들은 그 공허함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게 될까. 공허함이 아이의 마음에 자리할 때 아이들은 그걸 무엇으로 채우려 할까. 나는 어제 잠들기 전 무엇을 생각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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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8.



오늘 운이 없게도 카페가 무척 시끄러웠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갔기에 소란스러울 것을 알았지만, 12시가 가까워가는 시간에도 진정되질 않았다. 이른 시간의 시끄러움은 다수에 의한 것이지만, 늦은 시간의 시끄러움은 한 여자 때문이다. 운이 없다는 건 주관적이지만 객관을 함유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겼다. 오늘은 운이 없었다기 보다 재수가 없었다. 더 주관적인 표현이고, '나 오늘 재수가 없었어'처럼 동정을 구하려는 의도 없이 씨발을 한 번 읊조리는 것과 같은 의미다.


내 자리를 박박 긁은 그 여자의 말은 어제 술을 먹으며 생긴 사건, 말, 생각에 관한 것이었다. 하필 읽는 게 철학책이어서 주의를 나눌 여유가 없고, 그 소리를 의식에서 격리시킬 수 없었다. 듣지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는 그 소리는 들을 만한 내용도 없었다. 말은 술을 먹은 사건에서 최근 신변잡기로 나아갔다. 사전 지식도, 맥락도 없기에 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평소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겠으나 요즘 한 번씩 심하게 욱씬거리는 왼머리를 날아와 때리는 그 여자의 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소리 외에도 내 주의를 끈 건 그여자의 행동이다. 음료를 하나 들고 앉아 1번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30분 이상을 훌쩍 넘기 통화 후, 곧바로 2번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대략 2시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통화를 하고, 내가 카페를 나갈 무렵 3번 사람이 없나 전화를 뒤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카페는 누군가에겐 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다. 그 목적에 꼭 맞은 행동을 한 그녀 앞에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여자가 쏟아낸 말의 양과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관념적, 형이상학적, 현대적, 사이버적 등등 고루한 표현으로 양에 차지 않는 이 현상은 내가 몸 담고 있는 현실을 훌륭하게 표상한다. 일하는 척, 공부하는 척, 독서하는 척 앉아 SNS만 하다 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시대에 좀 뒤떨어진 감이 있으나, 관찰가능한 행동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보다 더 행위예술적이다.


그여자를 관찰한 객관적 환경 외에 내 귀가 박박 긁힌 내적동기를 적어보자면, 그런 쓰잘데기 없는 말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행위에서 아무런 의미를 읽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왜 타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것들을 버리는 걸까. 분리수거의 과정도 없이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재활용의 여지도 없어 단 1분 후에 허공에 흩어질 말들. 내 귀를 긁는 건 쏟아지는 질 떨어지는 언어와 나로서 이해할 수 없는 말하기 행위였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를 강화해 '무(無)'를 생성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주둥이를 쎄게 후려치고 싶은 그여자와. 짧지만 강렬하게 매장을 뛰어다니며 소리친 애새끼와 그 애새끼를 어부바둥둥한 어른 새끼 몇 명. 늦은 시간 급작스럽게 생길 뻔한-다행이 생기지 않은- 술자리도 내 머리 속을 박박 긁었다. 두통이 올 듯 뇌에 몸살기가 느껴져, 그여자처럼, 급히 글을 써 화장실에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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