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130430.



2.

 

내면을 탐구한다는 게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아니라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행위를 표현한, 표현일 뿐이다.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는 것조차 모호하다. 내 안에 진짜 공간이 있는 것인지, 갖고 싶은 것인지,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욕망일 뿐인지, 도망칠 곳이 필요한 것인지, 누군가 있다고 하니 있는 것인지. 존재의 유무를 따지기 위해서라도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나와 같은 경우엔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린 게 섬에 갇히면서다. 갈 곳이 없었고,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안으로 안으로 가라앉았다. 보통의 나였다면 내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보들에 대해-욕망, 본능과 같은 것들-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한 정보를 해석하는 법을 배우지도 않았고, 추상적으로 중요하다, 라고 몇몇 책에서 읽었지만 실제로 중요한지도 몰랐다. 내가 살아오는 시간에 걸쳐 훈련한 것은 어딘가 밖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해석하는 행위들 뿐이었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내가 행위의 주체는 아니지만 사회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해석을 하고 몇 마디 덧 붙이며 나를 둘러싼 세계의 그림을 그린다. 나라는 존재는 그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었고 존재 자체가 목적이었다. 어쩌면 맹목적 생존기계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라 앉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속수무책이었다.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놔둬볼까 싶었지만, 그 끝이라는 게 뻔함을 깨닫고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가라 앉던 몸뚱이를 끌어 올려야만 했다. 가라앉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가라 앉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아무도 애기해주지 않았다.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던 건 몇몇 책에서 다른 세계가 있다란 암시, 묘사 등에서 내가 가라 앉고 있는 세계가 어디인지 지례 짐작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두렵지만 멈출 수 없었다, 침잠은 나의 선택으로 발생한 결과와 타인이 선택한 결과들이 얽히고 설켜 도무지 풀 수가 없었고,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돌이켜 보면, 물 한 가운데서 온 몸에 힘을 잔뜩 주고 가라 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 꼴이었다. 힘이 빠져 가라 앉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내가 배운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어딘가를 향해 손발을 저어 닿아야 했고 닿아야 하는 곳은 항상 존재해야 했다. 항상 물 위에 떠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요 받았고 물 위에 떠 있는 법을 배워왔지만, 가라 앉는 법과 떠오르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침잠하다 다다른 곳이 어딘지 모를 섬이었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고독이나 외로움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 표현할 수 있을 듯한 세계였다. 그 섬이라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곳으로 나마 휩쓸려 갈 기력마저 없었다면 더 깊은 곳으로 가라 앉아 버렸을 것이다. 그곳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텍스트는 나 뿐임을 깨닫는다. 아무런 목적이 필요없는 그 시간에 무기력을 체감하며 내가 그동안 만들어 왔던 세계에 대해 무감각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갔지만, -돌아보면-정작 나에 대한 감각은 살아나고 있었다. 그건 낯선(uncanny) 경험이었다. 늘상 사용하는 외롭다, 혼자다, 고독하다, 하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같은 표현들이 생생하게 다가 왔다. 낯선 공간, 경험은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 나를 엄습하는 낯선 공포는 세계와 격리된 나를 더욱 숨게 만들었다(그게 나의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상실하고 익숙하게 생각했던 고독이 불쑥 세계를 재구성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 떨어진 나는 무엇을 할해야 하는지 몰랐고 낯선 것에 노출된 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익숙한 것(canny)과 낯선 것(uncanny)이 혼란스럽고 서로 자리를 바꿔갔다, 내가 섬에 머물렀던 건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공포감을 느끼고 도망친 결과이기도 했다.

 

내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진실로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었던 것인지, '진짜 세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지금도 진짜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을 부수고 싶은 욕망에 갖고 있던 것을 상실하고 회피한 것인지,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혼란과 공포에서 도망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두 가지의 욕망과 충격이 모두 기제(機制)로 작용하긴 했을테지만 무엇이 더 강한 자극이었는지 모호하다(이런 기제가 작동하게 된 핵심 사건을 여기서 다루진 않겠다). 영화 트루먼 쇼의 짐 캐리처럼 일상의 균열을 감지하면 멈출 수 없는 호기심과 균열 뒤에 있을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행동을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기도 한 것 같다. 내 경험의 특수성과 내가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고 공포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자연스러운 경험이기도 했다. 존재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거치게 된 과정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내가 좋아 하는 표현인-'가장 보통의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라는 존재와 '위치'를 자각하는 시간이었지 내가 어떤 우월하고 '독특한 지위'를 가진 인간이 되는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 상실한 세계에서 내가 특별하고 지위를 가진 인간임을 원했다면. 가라앉고, 섬을 발견-생성하고, 다시 섬을 나오는 과정을 통해 내가 그저 평범한 인간임을 느끼고, 단지 '인간'이라는 '보편자' 중 하나의 '개별자'로서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일련의 시간적 흐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흐른다. 흐름에 깊이 잠기는 것과 얕게 잠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 벗어날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담게 됐다. 과거처럼 무기력과 고독,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 않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익숙하고도 낯설다. 이러한 요소는 나라는 존재의 충분조건이지만 전체가 될 순 없다. 그래서 택한 것이 내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이름을 선택해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 만들어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기에 그 절대성을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이 가진 절대성은 가히 아틀라스가 떠받치는 하늘과도 같기에 내가 감당할 수 없다.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지만, 내적 심연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고 깊이 가라앉을 수 없었다. 내면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타자가 필요했다. 필요한 건 타인과의 관계였고, 타자들이 만든 세계에 내가 속해 있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을 취했다. 죽음이 내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수작(酬酌)이라 불러도 할말 없다. 난 진짜 수작이 필요했고 그러한 수작이 내가 익숙한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 요소였으니 말이다.

반응형

'옛블로그1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베_4  (0) 2018.02.28
일베_3  (0) 2018.02.28
일베_1  (0) 2018.02.28
글 쓰기 전문가  (0) 2018.02.28
시네마 천국과 사랑  (0) 2018.02.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