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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2.


그는 소위 (빡쎈)'운동권'이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전국을 돌며 한미FTA가 왜 잘 못된 것인지를 강의하고 다녔다. 대학가 운동권의 끝물, 90년대 후반 학번에서 그는 두드러지는 엘리트 운동권인 셈이다. 의례 그렇듯, 그는 그 바닥에서 꽤나 아는 사람이 많았고, 선후배 관계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운동권이란 사람들이 갖는 직업이란 게 얼추 정해져 있기 때문이고, 그 또래에서 아직까지 NGO 영역이나 노동운동과 관련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을 한창 다닐 때 '운동권'문화를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NL, PD 이런 표현들을 하나도 몰랐다. 나중에 그런 사람들과 꽤 어울렸지만, 아직도 모른다. 내가 봤을 땐 그나물에 그 밥이었고, 이론적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내가 그런 단어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십년 넘게 교회에 다녔지만 성경 첫 페이지의 주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듯, 그들의 이론이란 게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았고, 솔직히 진짜 쓸모 없는 짓거리란 생각을 가졌다. 내가 만난 시점에서 그들에게도 그 시절의 것들은 마치 추억인냥 다뤄졌다. 


 그가 빡쎄다고 해야할지, 이름 좀 알려진 운동권 인물이었지만 그와 그 주변의 인물들은 과거의 것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NLPD의 이론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한미관계,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 뭐 그리고 국가적 전체주의나 독재에 반대하며 민중을 중시하는 전통적 무리들이-가장 중요한 건 자본주의를 반대해야 한다- 얼마 전 정치권을 시끄럽게 달궜던 통합진보당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 바로 전 이름은 한총련이었던, 지금은 한대련이 된 세력엔 대학생 등 젊은 사람들이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활동한다.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거기 보다 더 왼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또 몇 무리가 있다. 아무튼 별로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갈래로 구분돼 있어 난 잘 알지 못한다. 내가 그들을 구별하는 건, 이론적 경계가 아니라 '무리'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차이를 둔다. 어울릴 수 있는 곳과 물과 기름 같은 집단, 비슷한 성향을 보이기도 하며 사건에 따라 입장이 또 상이한 일군의 무리 등등은 꽤 인간적인 기준을 갖고 구분돼 있다. 친분, 인간적인 호불호, 권력지형에서의 땅따먹기 같은 게 기준이다. 옛날에야 모르겠지만, 이론이 어쩌구저쩌구하는 건 정말 옛날 얘기지 싶다. 당사자들이 들으면 천인공노하겠지만 내가 봤을 땐 너무 인간적일 뿐이다(더 자세한건 '대선을 보고'란 글을 참고). 


 사실 그 집단 문화에 반발한 셈이지만, DW는 자신의 주변인들과 새로운 영역에서의 사회활동을 펼쳐가고 싶어 했다. 고루한 옛날 얘기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젊은 사람들의 감각으로 세련된 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그와 주변인들이 나름 그 바닥에서 주목 받은 건 변화하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고, 환경이 요구하는 바와 적절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뒤에 쓰겠지만, '태생적'으로 변화의 한계가 존재했고 변화란 건 결국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새로운 한다라는 명제만 남는데, 이 타이틀을 갖고 싶었던 게 이유였다. 


 '운동권'이라 표현하는 집단은 우리 사회에서 손 꼽히는 보수적인 집단이다. 변화와는 담을 쌓았고,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변화를 수용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비판에 대응하는 태도는 두 가지다, 받아 들이거나 밀어 내거나. 운동의 전통을 잇고 있는 세력이 통합진보당이니 한대련이니하는 이름을 걸고 남아 있고, 이에 반대하는 태도를 지닌 이들이 어느 정도 변화의 필요성을 수용하며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DW는 후자의 성향을 가진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는 이들 전부를 통틀어 '진보'라고 부르곤 한다.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진보'란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세력 내에서도 꽤나 많은 갈등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외부로 표출되는 사건은 정당과 관련된 갈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민중운동을 지향한다지만 사실 정치권력의 효용성을 절실히 느끼고, 또 원하기에 권력이란 자원을 획득하면 이를 둘러싸고 꼭 갈등이 발생한다. 물론 갈등해결을 위한 합리적인 프로세스나 경험 없이 수직적 위계와 단일한 가치체계를 통해 갈등을 해결해 왔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있을리 없다. 몇 차례 분당과 소수정당의 발생과 소멸의 맥락은 가장 크고 전형적인 갈등형태를 드러내는 사건인데, '진보'에 속한 이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적'이라 부를 수 있는 진보 내 갈등대상에게 감정적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희석되고 갈등해결을 위해 방법론을 고심하는 이들이 당연히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적대감이나 회의감이 쌓이고 그들 적대적 집단 간 멤버십이 강해질 뿐이었다. 마치 비온 뒤 땅이 단단해지는 것과 같다.


 운동 좀 했다,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건 약간의 영웅심과 이를 뒷바침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겠단 추상적 가치를 쫓는 이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덕목'이겠지만. DW가 지식인으로서 갖고 있는 사명감은 과거 운동권에 몸 담았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이로써 스스로에게 부과한 책무 같은 것인데 과거의 것이 더 이상 현재를 대변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과 형태를 가지고 '운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좀 더 진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 변화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그런 사명감말이다. 그는 항상 삶에 대해 몽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미래를 설계해 사람들에게 떠들길 좋아 했는데, 이러한 '수다'는 그 스스로 부과한 사명감, 책무의 무거움에 대한 내면적 반발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인생 플랜은 시시각각 변했기 때문에 특정 지을 수 없지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끝까지 사회 활동을 이어가며 운동을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다른 하나는 운동과 관계 없는 즐거움을 중심으로 삶을 계획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 장사를 한다든지, 어디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살겠다든지, 예술과 밀접한 삶을 살겠다든지 하는 삶의 모습. 난 당연히 믿지 않았고 현실성이 없다 생각했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삶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가 더 그 다웠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후자의 삶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없을텐데, 전자에 해당하는 삶의 형태가 지금까지 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삶의 형태와 내용을 버린다는 건 그동안 그가 굳게 쌓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에 그로서는 선택이 정해진, 답이 이미 정해진 문제를 고민하는 꼴이다.   


 그가 자유로운 모습, 풍류, 예술, 변화된 지식의 습득을 타인에게 표출하고 싶은 건 그가 속한 '집단'이 결여하고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정체성인 운동권 엘리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이어가야 할 DW '개인의 역사'의 논리적 정합성을 위해 그가 속해 왔던 집단과 단절은 발생할 수 없다. 이들은 변절이란 단어 사용을 서슴없이 사용하는데, 옛날에 믿고 따랐던 사실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태도의 변화를 갖는 이에게 어김 없이 '변절(자)'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준다. 수 십년 동안 전승되어 온 사회과학 이론을 떠받들고 있는 이들에게 난 경악했지만, '진보-좌파'라 스스로 칭하는 이들에게 '신념'을 지킨다는 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작용한다. 더 강한 '진보-좌파'는 더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 신념으로 평가된다. 그 집단은 이미 신성화 된 지식과 경험들이 '바이블'처럼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새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얼마나 열심히, 진정성을 가지고 믿는 가를 기준으로 위계질서와 집단의 인적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이런 진보-좌파적 신념을 가진 이들의 직업군인 노조, 시민단체, 국내 여러 영역의 NGO, 특히 (야권 성향의)정치판에 '인적 수혈'이 되지 않는 이유는 고리타분한 '바이블'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로부터 파생되는 집단윤리와 위계질서에 순응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뉴스를 볼 때마다 왜 데자뷰를 느끼냐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 똑같은 '인간'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돌려 막기, 회전문 인사를 강하게 비판하는 집단들도 전혀 다를 바 없다. 그 공고한 인적 네트워크란 게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난 몇 년도 지나지 않아 경직된 집단문화에 지루함과 답답함, 무기력을 느꼈는데 긴 시간 동안 일선에서 활약하던 DW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들이 변화하지 않는 건, '넓은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 없이 한 자리를 파는 깊은 지식을 추구한다. 너무 깊이 파다보니,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사회를 깊은 지식으로 퉁쳐 버린다. 정말 몇가지 안 되는 개념-추상명사로 사회현상 전부를 설명한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노동(자), 정의, (불)평등, 계급 등이 그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가 노동자 계급 착취를 정당화하여 불평등을 야기하고 사회의 정의를 해치고 있다." 마치 기-승-전-"00"처럼 모든 문장의 시작과 끝은 저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된다. 기실, DW의 변화란 것도 문자의 내용은 그대로 둔 채 형식과 단어를 좀 더 새로운 걸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 번은 그의 동료이자 절친이 (분당 전)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뽑기 위한 '위대한 진출'에 후보로 나간 적이 있었다. 최종 단계까지 진출한 DW의 친구는 토론에서 이런 사회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최근 청년실업 문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청년층의 실업문제, 청년층과 얽힌 사회 문제는 결국 (이면의) 노동의 문제이자 노동계급의 문제가 현실에 드러나는 주요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질문을 받은 이유는 DW와 그의 친구 등 몇몇이 사회적으로 주목 받는 청년노동단체를 하나 만들었기 때문이다(물론 나도 관련돼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세세한 것까지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나는 DW와는 아니지만 그 친구와 여러 차례 회의와 토론 아닌 토론을 했고, 종국에는 이 '노동(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은 천년고목과도 같은 것이구나 싶어 변화의 가능성을 접은 바가 있다. 그들에게 청년층의 문제는 단지, 노동-계급 문제의 한 형태이고 청년층이란 노동운동의 새로운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변화의 가능성과 비전으로 주목 받았던 '청년노동단체'는 결국 새로움은 전혀 없는 행위와 운영으로 스스로의 지위를 한 없이 밑으로 끌어 내리고 말았다.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가능성과 예측불가능한 요소를 제거해버렸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DW와 그 주변인들은 한 마디로 '운동권 엘리트'다. 20대 초부터 남들 앞에 서있던 이들이, 또 그렇게 생각해왔던 이들에게 새로운 건 그다지 필요치 않다. 잘 해왔던 걸 포기하고 위태로운 타이틀을 얻어가며 굳이 새로운 걸 취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지위는 이미 젊은 시절 쌓은 유물 위에 견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던 이유, 변화의 가능성이 결국 형식만을 취한 건 DW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나름의 성취를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변화하려는 욕망의 실체는 자신이 쌓은 유산을 딛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권력지형을 바꾸고자 하는데 있었다. 새로운 청년단체를 만든 것,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에 나간 친구에게 함축된 의미(이 때는 나도 열심히 응원했다)는 DW를 포함하여 그 주변에 있는 젊은 이들이 집단-진보, 좌파, 또는 운동권으로 표현되는-의 고질적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며 그로부터 발생한 틈에 자리 잡아 존재를 과시하고 세력으로 인정 받는 것이었다. '패권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하나의 세력이 되고자 했지만, 말만으로도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행보를 보면 이젠 아예 '집단' 밖으로 나가 자리잡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그도 쉽진 않을 것 같다. 


  


 꽤 명석한 머리를 가진 그는 언변 또한 좋다. 어느 자리 건 화제를 주도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술자리든 회의든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 얘길 들어주는 걸 좋아 한다. 그와 자주 어울리는 이들은 그의 삶의 태도를 즐거워하고, 신기하게 보는 이들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인데, 그의 이야기는 너무 일방적이라 개인적으로 재밌지 않고, 중요한 건 내가 남자와의 대화를 즐겨하지 않는단 사실이다. 남자들에게 대화란 게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한데, 대화마저 '승리'하려는 성향이 곧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승리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강점은 부각하고, 약점은 숨기는 것이다. 내가 DW의 태도에서 각별히 싫어하는 게 하나 있는데, 토론이나 불리한 주제를 다룰 때 대상이 되는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항상 주변에 모인 모두에게 이야기하지 상대편을 직접 대하지 않는다. 무슨 공화정 광장에서 대중에게 연설하듯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이다.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을 자기에게 끌어 들여 승리를 챙긴다. 타인과 이야기를 주고 받기 보다 이미 결정된 답을 구하는 게 그에게는 편해 보인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답이지만. 훌륭한 방법이긴 하다, 대화나 토론 자체가 성립하지 않도록 상황을 꾸리니 그가 부담질 것도 없다. 그 자리의 분위기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하도록 만들면 된다.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 받아온 그에게 어찌보면, 너무나 어울리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말의 권위'가 지켜지길 원한다.  


 권위를 지키기 위해 못하는 건 단호히 거부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적당히 다른 사람과 맞춰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예 관심을 꺼버리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그는 한 두가지 분야의 아무추어정도 수준의 잡기를 지녔는데(직업적이 아니며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적기 때문에), 취미라 부를 수는 없는 게 평소 그가 잡기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본 유일한 취미는, 거의, 음주다. 음주에 이어지는 기나긴 수다와 취해 부르는 술자리의 노래정도. 운동과 관련된 행위는 일절 거절한다. 노래나 춤추는 것도 극렬히 거부한다. 내가 봤을 때-그 부류 인간들이 대부분 그렇듯- 술 먹는 거 빼고 정말 재미 없게, 잘 못 논다. 전국민 공통 취미인 영화를 그나마 즐겨했다. 닉네임을 능력없는 영화 애호가로 할정도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말, 능력은 없었다. 한 번은 은교가 한 동안 회자될 시기였는데, 그는 틈만 나면 은교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 놓길 마다 하지 않았다. 마침 소설을 읽었던 터라 영화와 책을 비교하며 은교에 대한 평론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가 그렇게 다룰 수 있는 소재의 컨텐츠는 거의 없었고, 몇 가지 걸린 게 있으면 반복하길마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수준이란 게 영화나 책을 좋아 하는 블로거가 '아, 이 영화(책) 괜찮다'더라 수준이라, 들었던 이야기를 장소만 바꿔가며 반복해 들을 때마다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와 업무를 하며 디자인 관련 회의를 하면 그 나름의 감각을 가지고 있고, 영화나 음악에 대한 취향도 가지고,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걸 걸러낼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어 보였다. 책은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긴 했지만, 독서도 꾸준하게 하는 편이었다. 다만,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인지 예술에 대한 관심이나 센스에 비해 지식이 늘지 않았다. 습득하는 지식이란 게 전문적이라기 보단 타인에게 늘어 놓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금새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돼 있었다. 몇 년 그를 보는 동안 내내 '수준'-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판단할 필요는 있지만-이 제 자리였다. 문화, 예술을 상대적인 평가, 주관적인 심미안을 가지고 보면 되기에 객관적인 판단과 분석이 필요치 않기도 하지만, 다른 이에게 일장연설을 늘어 놓으려며 그 장르에 걸맞는 지식과 경험을 배울 필요는 있다. 스스로도 더 많은 걸 즐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예술 장르를 즐기는 기쁨보다 그에게 더 큰 기쁨은 말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정도의 감정과 표현도구들이 유지된 것 같다. 말버릇처럼 자신의 연애는 미술하는 이성, 예술하는 이성과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기엔 운명적인 사건이 없고서야 관계가 지속되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예술에 대한 관심에 비해 가진 패가 별로 없던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언어가 가진 권위에 대한 만족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예술에 대한 자기만족은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대화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성향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자기 이야기에 아주 만족하여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그의 태도에 기인한다. 자신의 낭만과 몽상, 지식, 감각을 드러내 보이고 타인이 그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냄을 즐긴다. 자신의 이야기가 인정 받는 다는 사실,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를 타인인 받아 들이고 있다는 신호를 원하기에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의 토론이나 회의, 대화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반대되는, 또는 다른 의견을 접할 때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몸짓은 이미 연설이라도 하듯 여러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고정되지 않는 이유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의 권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업무의 영역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회생활이란 곧 '위계질서'에 대하 적응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권위는 사회생활에서 적절한 도구임에 분명하다. 앞서 이야기한 청년단체의 대표가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에 나갔을 때가 있었는데(DW의 친구가 나갔던 비례대표 선거와는 다른 당에서 진행했던 것이고, 그 친구가 나갔던 선거보다 더 빠른 시기에 진행됐다), 당선과 청년단체 내 반발-청년단체 구성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 관심도, 호감도, 참여도가 천차만별이었다-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종의 '비밀 프로젝트 팀'을 만들었다. 청년단체의 대표가 선거에 나가느냐 마느냐부터, 만약 나간다면 선거를 이기기 위해 어떤 기획과 이벤트를 진행해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준비하는 팀이었고 우연찮게 나도 포함됐었다. 난 목적과 선거 참여의 이유가 맞지 않아 얼마 후 팀을 나왔고, 대표의 정치참여 건은 생각보다 문제가 커져 수습이 힘든 상황까지 이르렀다. 결국에는  음지에서 활동안 팀이 있었음을 밝히게 되었고 청년단체 내 구성원 간 신뢰에 금이 간 사건이 있었다. 


 업무나 조직 운영에 있어 수평적, 민주주의 등 이러한 요소는 사실 DW에겐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찌보면 결과를 중시하는, 목표달성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건 그가 결정에 관여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다. 그를 알게 된 건 앞서 말한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며 알게 됐는데, 그 당시엔 직접적으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가 얼굴을 잘 내밀지 않았기도 했지만, 지금 따져보면 그는 결정권을 주로 행사하는 입장이지 실무를 처리하는 위치에 있는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얼굴을 알고 지내다 기회돼 함께 돈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됐고, 그 때 DW에 대해 더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우리가 속한) 조직을 운영하는데 민주주의 같은 건 필요 없다"라고 공언하며 DW 자신과 '(조직 내 모든 결정권을 가진)리더'가 준비한 조직 운영 플랜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함께 청년단체에서 활동했던 이들에게 DW관해 들었던 표현은 '원래 혼자 다 한다'였다. 중요한 결정을 해 통보하거나, 여기서 그의 처세술을 볼 수 있다, 결정권을 가진 몇몇과 접촉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토록 한다. 그는 권위를 행사하길 바라지 절차를 통한 수렴을 원하지 않는다. 우린 결국 부모를 닮게 된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DW 젊은 시절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한 '운동권(집단)'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스스로 답답해했던 견고한 위계질서와 변화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든 보수적인 조직 운영을 반복했다. 그는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세련된 무엇을 바랐다. 주변인들에게 그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하고 몽상했으나, 그가 배운 건 자신이 바라는 능력과 정반대의 것들 뿐이었다. 그는 (나와 일했던)조직 내에서 전임 '2인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자리를 빼앗긴 전 2인자가 DW와 업무를 시작하며 우려했던 일이도 했다. 권력과 권위를 가질 수 있던 자리를 DW는 원했고, 결국 갖게 되었다. 그는 맘껏 자신의 권위를 누렸지만 말과 행동이 상이한 경우가 종종 발생했고,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철저한 위계질서를 도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DW는 자신의 게으름, 비규칙적인 업무 시간, 업무 지시 등을 자신의 자유로운 성향과 연결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본 건 자신의 자유로움을 자랑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러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는 모습이었다. 권력욕, 명예욕도 없다 말하지만 DW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을 욕망한다(물욕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의 주요한 정체성을 형성한 '운동권'의 경험은 그를 정치적 인간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곳은 나의 시각에서, 시도 때도 없이 권력다툼이 일어나는 곳이다. 작은 결정부터 큰 결정까지 민주적이고 크리에티브한 아이디어의 결과물 따윈 없다. 누구의 발언권이 더 강한가, 누가 더 큰 발언을 할 수 있는가, 누가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가! 괴물을 공격하며 괴물이 되고 만다는 표현이 그대로 적용된다라고 할까. 살아남기 위해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 없이 관계를 맺고 관리해야 한다.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만큼의 권력이 필요하고 그러한 권력을 갖기 위해 처세를 한다. 우습게도 이 바닥 사람들은 체세에 아주 능하다. 아니, 능하기 보다 본능적이다. 선택을 할 때 어떻게 갈등을 줄일 것인가, 갈등을 줄이기 위해 누구를 설득하고 어떤 의견에 따라야 하는 것인가, 누구의 권위에 좀 더 힘을 싣어 줄 것인가. 한 번 상처나면 쉽사리 되돌릴 수 없는 바닥이다, 뭐 안 그런 곳이 있겠냐만은. 거창하게 말하지만, 사실 그냥 사람들이 사는 곳일 뿐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치적 인간으로 훈련된 DW는 본능적으로 권력을 탐지하고 획득한다. 운동권의 경험을 통해 획득한 정체성과 운동권으로서의 정체성과 다른 하나의 정체성이 그의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원인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술을 좋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떠드는 걸 좋아한다. 어떤 종류의 예술이든 나름의 심미안을 가지고 즐기려 한다. 일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려는 태도(물욕을 가지지 않는 것과 상호관계), 한량처럼 보이기도 하는 생활태도는 자신의 삶을 꽤나 아끼고 즐기려는 쾌락주의적 성향으로 나타난다. 낭만주의자이길 원하며 자기 얘길 즐겨하는 그는 분명 나르시즘을 갖고 있다. 자기애를 갖지 않은 이가 없지만, DW의 나르시즘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 받길 원하는 적극적 태도로 나타난다. 자신이 즐기는 것,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경험-감정을 드러내 인정 받는 것에 자기만족을 느낀다. 강한 자기애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가진 부정적 속성-보수적, 강한 위계질서 등-에 반발하며 두드러진다. 어느 순간까지 '운동권' 문화는 DW의 자기애를 충족시켜 주지만 한계를 드러내며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애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운동권 엘리트이자 지식인으로서 가진 사회적 책무감과 나르시스트로서의 쾌락주의적 갈등이 가끔은 마치 그를 '허풍쟁이'처럼 보이게 만든다(이제 난 그의 '계획'들을 전혀 믿지 않는다). 직업, 사회생활, 인간관계 등 현실적 조건은 '운동권'의 유산으로부터 지배 받지만, 자신의 나르시즘은 충족되지 않아 점점 더 몽상을 하는 것이다. 나르시즘은 물론 자신의 만족을 의미하지만, 우리의 욕망 대부분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나르시즘 역시 타자의 시선을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게 '말의 권위'를 등에 진 채 자신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전하고,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에게 끊임 없는 수다를, 위기감을 느낀 상대에겐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평범하지 않은- 불쾌한 행동을 취한다. 그는 내가 보아온 동안에 주요한 결정들은 두 가지 모습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이었다.


 DW에 관해 누군가와 이런 얘길 나눈 적이 있다. "그 바닥 사람들은 이제는 원하지 않아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경험들을 쌓아 와서 그런지 자기가 원하는 걸 못하는 것 같아 좀 서글퍼 보여." "맞아, DW도 술에 취해서 그런 얘길 했던 거 같아.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라고." DW의 변화가 한계에 부딪친 건, 그이 스스로 자신을 아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면 지금의 삶을, 지금의 자신을,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코 그런 결정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사회적으로, 시기가 늦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는 나에게, 대화 자체가 드물지만, 자신이 짝사랑하는 이성에 대한 이야길한 적이 있다. 물론 그는 짝사랑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요즘 잘 지내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애인이 있었고 DW와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처럼 순진한-부정 없이 기대(희망)에 가득찬- 사랑을 하는 모습에 (속으로)손발이 오글거렸지만 그게 정말 그다운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DW의 짝사랑은 왠만한 주변인들이 다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건너건너 이미 들었었다. 직접 눈 앞에서 확인한 그의 모습은 20대 초반의 풋풋한 열기마저 느껴졌다. 맞다, 여전히 그는 사회적 능력과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풋풋한 열정이 가끔 낭만이 아니라 허풍이 되기도 하지만, 내적 갈등을 적절한 방향으로 이끌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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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6.



 그녀는, 어떤 면에서 완성된 인간형이지만, 그건 그녀 스스로 만든 모델의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 훌륭한 인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이 유형화돼 있어 어느 정도 사례를 쌓으면 그녀가 만든 정체성,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데 꽤나 강한 의지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답게 그녀는 원하는 정체성을 견고히, 그리고 쉽사리 틈을 내거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 유능함을 그런 곳에, 아주 정열적으로 쓰고 유지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는 모습이 아쉽다. 그래도 완성이란 표현을 유지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지적 호기심은 왕성하다. 특히 그녀가 전문분야로 여기는 군사, 여성이란 주제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최근 '군사'의 주체, 여성성의 억압 주체로 국가를, 또 그 국가가 행하는 폭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실제 사례를 통해 경험을 쌓고 있다. 그 또래에 비해, 혹은 좀 더 어른 연배의 다른 이들에 비할 때도, 그녀는 많은 시간 전문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은 이미 패턴화돼 생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삶에서 우선 순위인 것이다,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때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붇는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갉아먹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추후 자세히 설명토록 하겠다.


 그녀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나름의 수준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건, 그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보다, 이 지적 호기심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생활의 결과처럼 보인다. 그녀의 생활 패턴은 '-홀릭'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홀릭이란 표현 앞에 지식, 지적, 공부, 연구 등의 단어를 붙이기엔 약간 무리가 있는 느낌이 들어 어떤 홀릭이라 구체적으로 명명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 자체는 필요 이상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 듯 보이며 집착스런 모습을 종종 보이기에 홀릭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그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그녀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는데, 분야를 가리지 않은 채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모습이나 업무와 관계없는 영역의 정보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보았을 때 지식 자체를 습득하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다양한 사례들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번은 군 관계자와 그녀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미군함(인 것으로 기억한다)의 용량을 그녀가 맞춘 일이 있었다. 오히려 군관계자가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그녀는 두고두고 자랑했다.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는 일이 잦지 않았음을 생각한다면 드물게, 거의 유일하게 즐거워하며 이 일을 반복적으로 자랑했다. 그녀는 이겼다는 표현으로 이 사건의 결과를 정의했다. 군사 관련 전문가와 일종의 게임을 했고, 이긴 것이다. 민간인으로서 군인의 지식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녀는 다른 이에게 상담해주길 바랐는데 특히 여성과 관련된 일일수록 더욱 관심을 보였다. 연애나 사랑, 생리적 현상, 사회적 성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했고 가끔은 그녀의 호기심을 피하기 위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할 정도였다. 그 '오지랖' 때문에 몇 차례 사람들은 불편함을 겪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무라 생각하는 듯 타인의 시선은 괘념치 않았다. 다른 이의 어떤 고민을 상담해주겠다, 공감하겠다는 그녀의 목적에 비해 본다면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고민거리를 안 겼으니 말이다. 일을 같이 하는 동료 몇몇은 그녀에게 여성(상담)전문가, 심리전문가라고 불렀고 그녀는 이를 아주 즐겨했고 당연하게 여겼다. 한 번은 사람들이 또 그녀를 심리전문가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그녀 앞에서 코웃음을 쳤던 일이 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싸움(토론)을 즐긴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그녀가 실제 격렬하게 토론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동의나 '승리'가 전제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지식과 유능함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대부분의 상황에 개입하긴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결론과 다른 결론에 반박할 수 없다면 상황 자체에 침묵하고 무기력해진다. 순식간에 '고뇌'하는 모습을 갖춘다. 사소한 것들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종종 봤지만(관심 없다, 관심 없어하려 한다는 게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한 차례 선거를 준비하며 이런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선거를 함께 준비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후보의 컨셉, 선거 전략, 인력 운영 등 이미 중요한 대부분의 사항이 몇몇에 의해 결정(‘몇몇’을 '그룹A'라 부르겠다)되었고, 나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실무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통보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여러 사안들을 주요하게 논의하고 결정하는 '그룹A'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주로 후보의 '정치적 캐릭터'를 잡는 역할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선거를 이끌어 갔던 '그룹A'은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실패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선거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회의가 진행됐고 선거의 전략과 준비에서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그녀는 몇 차례 방어를 시도하는 듯하다 곧 입을 닫고 무기력해졌다. 평소 선거에 열정을 쏟으며(그녀는 새로운 '지식거리'를 습득하고 '안다'를 드러낼 기회였다)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룹A'에 포함되어 있던 이는 두 명이 회의에 참여했는데, 그녀는 그 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이 쩔쩔 매며 회의에서 지적된 사실을 잘 반영하겠다 말 했지만 결국 문제점은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녀는 회의가 진행되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세계에 빠져 버린 듯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그녀와 그녀가 속한 '그룹A'와 전혀 무관한 사실, 단지 선택을 고려할 하나의 정보에 불과했고 그녀는 정보를 차단하는 편을 선택했다. 선거 이후(당연히 실패했다) 그녀의 평가는 '사람들이 잘 따라와 주지 못해 아쉽다'였다. 선거의 실패 역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회의에서 발견했듯, 그 순간부터 선거와 관련해 그녀는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그룹A'는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수집, 분석과 같은 기획 단계가 -터무니없이-모조리 생략됐다. 놀라웠던 건, 객관적 자료는 아무것도 없이 문 닫힌 방에서 '그룹A'의 구성원이 모여 주관적인 정견, 분석만을 가지고 선거의 모든 플랜을 기획했다는데 있다. '그룹A'의 이러한 행위는 그녀의 성향과 거의 일치한다. 습득한 지식과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그녀는 학술적 과정, 연구 방법 등을 충분히 습득했지만 가끔 그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 검증 받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객관적으로 정보, 사실이 판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안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주관성이 객관성을 덮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녀에게 안다는 것은 내재적 행위가 아니라 외향적 행위이며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은 결국, 객관성이라는 것은 그녀가 구축한 것 안에서의 객관성이지 객관적 사실의 나열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나아가고 만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꼈다. 그녀의 이 말은 나를 놀라게 했고 아득하게 만들었다. 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표현이지만 현실세계에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는 멀고 먼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제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십대 초중반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한동안 몸이 꽤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통스러웠다고, 괴로웠다고 한다. ‘세상에 모든 고통’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난 그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채식을 하게 된 이유는 죽어 가는 것들에 대한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고통을 ‘안다’고 했다. 대단한 사람이라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곧 그 말은 나에게 모든 의미를 상실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낀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말해주는 표현일 뿐이다. 고통이란 표현은, 그녀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라고 했지만,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통이란 표현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은 그녀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여겨서다. 몸이 아프다라는 물리적 조건, 어떤 존재의 무상함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감정에 기초하는 고통. 어떤 의미에서 그녀가 자신의 고통을 세상의 모든 고통이라고 여겼는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말은 학술적인 지식 외에 고통이라는 주관적이며 감정적, 추상적 표현까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걸 보이고자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했다.


 



 그녀에겐 4년, 5년 동안 만나온 애인이 있다. 그전에도 몇 차례의 연애를 했고 긴 시간 동안 만났던 대상이 있다. 연애, 사랑에 대해 초탈한 듯 웃으며 ‘그런 것쯤이야’란 분위기를 숨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이를 먹은 한 여자가 여유롭게 젊은 연인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모습을 바랐다. 다른 동료의 연애나 사랑 얘기를 낯간지럽게 즐겨했다. 사랑에 대해 ‘안다’는 그녀의 태도는 어김없이 드러났지만, 사랑일까, 나는 조금 서글펐다.


 사랑은 완벽한 타자성의 실현이다. 사랑을 하며 경험할 수 있는 건 나와 타인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하나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섹스의 쾌락은 나의 쾌락이다.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며, 예술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른 경험에 기반 한다.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깨닫는 것, 타자성에 대한 겸손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인들에겐 끊임없는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 타자성을 이해하고, 서로 건널 수 없는 공간을 줄여 가는 노력이 사랑의 주된 행위로 나타난다. 그녀의 사랑은 얼핏 보기에, 결과적으로, 사랑의 완성된 형태처럼 보였지만 사랑의 중요한 전제가 결여된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연인이라 할 수 있는 이성과 최근 동거를 시작했지만, 성적인 결합의 열망이나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가 아니라 생활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주거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 둘은 서로의 영역에서 충실히 열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속박하지 않으며 거리를 인정하고 서로가 존재함을 즐기는 사랑은 내가 바라는 사랑의 모습과도 닮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나는 타자와의 거리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난 타인의 사랑을 항상 부럽게 여기지만, 그녀의 사랑은 나에게 부러움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함께 일하던 동료가 그만 둔 일이 있었다(그녀의 동료이자 나의 동료다). 그러자 그녀는 심한 자책감에 빠졌다. 그 사람이 그렇게 고통 받고 괴로워할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나는 다시 아득해졌다. 왜 그녀가 괴로워하고 심각하게 고뇌에 빠져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왜 그런 의무를 스스로에게 짊어지우는 것일까. 그 동료가 그만두는 동안 자신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음에 심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전혀 놀라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자리를 버티고 있던 걸 인정해야 할 정도로 잘 참아 왔다. 나와 몇몇은 그가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눠왔다. 퇴직을 결정하고 통보한 날, 그의 괴로움을 알고 있던 동료 몇몇은 역시 괴로워했지만, 나는 그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크게 서글프거나 괴롭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는 편이 그에게는 도움이 될 결정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발생한 일련의 행위들과, 그의 표정, 분위기 등을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봤다면 누구나 그의 퇴직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퇴직을 인식한 순간, 그녀에게 고통이 발생했다. 고통은 그 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녀 옆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고통을 인지한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고통을 만들어내 자신을 가학하고 있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퇴직한 동료와 교류, 교감이라 부를 게 거의 없었고, 퇴직은 한 이의 입장에서 그녀 역시 -작은-하나의 이유였다. 그녀는 퇴직한 동료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여러 차례 되뇌었지만, 그건 퇴직한 이와 그 공간에 존재하는 고통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아니라 그저 그녀가 만들어낸 주관적 고통에 불과했다. (우습게도)퇴직한 동료는 며칠 뒤, 여러 이유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녀는 열심히 그의 눈치를 봤다. 돌아온 그와 한 팀에 속한 이들이 회식을 갖겠다고 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 따라 갔다. 그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책과 동료의 퇴직을 막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그녀를 그 자리에 이르게 했다. 후에 확인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따라간 상황을 역시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여겼고, 그 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었던 돌아온 동료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녀의 성격에 비춰 봤을 때 이해할만한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그녀를 관찰의 대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심지어 객관적 고통까지 만들어 내는, 그 주관성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를 ‘안다’는 행위에 집착하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그녀가 쌓은 방어벽 같은 지식들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건 그녀의 것도 아니며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보편적 성격의 것들일 뿐이다. 또한 그녀의 행동과 행위는 그러한 지식들과 무관하게 발생하며, 중요한 건 주관성에 의해 그녀 삶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쑥불쑥이랄까, 타인과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는 그녀의 행위는 주변인들에게 어떤 불편함을 발생시켰다. 그녀 ‘밖’에 존재하는 그러한 이질적 감정의 결과물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그녀 주변공간을 부유할 뿐이었다. 이제는 그런 역할을 거의 상실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녀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녀는 타인에 대해 알기 원하고, 이해하길 바라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이의 이야기를 꽤나 경청하는 태도를 보인다. A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나름 이해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내재된 갈등과 문제점을 분석해 해결하려는 의지, 의무를 만든다. 갈등 해결을 위해 A의 이야기는 B와 C에게 전달된다. 그녀의 충분한 해석이 덧붙여져서. 나 역시 한두 차례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가 엉뚱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등골이 서늘했다(나는 나를 어디서나 감추길 원한다). 나의 이야기가 내 해석과 의지는 담기지 않은 채 타인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아주 밀접한 곳에서, 아연실색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행위를 반복했고, 나는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 자체를 ‘실수’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 이야기에 담긴 부정적인 지점은, 고쳐야할 것이 되고, 결국 문제해결의 최종 대상은 ‘나’로 귀결된다. 문제해결의 주체는, 당연히 그녀를 포함한, 타인이 된다. 그녀는 ‘중재자’로서, 이야기가 오가는 대상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오가는 ‘정보’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 여기고 문제해결 방식 또한 객관적이라 생각한다. 고여 있는 정보와 감정들이 유통되지 않는 걸 못 참겠다는 듯 행동했다. 나는 얼핏 이 사실을 느끼고 그녀 앞에서 입을 다물게 되었지만, 한 동료는 꽤나 곤혹을 겪은 후에야 입을 다물게 되었다.


 ‘사회생활’에서 본다면, 혹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역할을 하는 이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확성기-스피커와 같은 역할이나, 아부를 위해 동료를 모함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그녀 주변에서 발생하는 문제해결을 위한 주체를, 모두 그녀로 설정하는 본능적 행위를 반복한다. 앞서 동료의 퇴직을 보고 어떤 의무감을 만든 것과 동일한 행위가 반복되는 것이다. 선의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악의를 담고 있다 할 수는 없다. 이는 몇 명이 모인 조직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도 적용할 수 있다. 문제가 발생한다, 사건을 인식하면, 관련 정보를 탐색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책임감을 짊어진 채, 해결책을 탐구한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 속에서 고통을 겹겹이 쌓고 스스로를 갉아 먹는다. 누구도 그녀에게 더 이상의 책임을 부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는 많은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게 그녀가 바라는 그녀의 모습이지만.


 


 안다는 것과 아는 것을 실제 행하는 것. 그녀 안에 내재된 이 공식이 그녀를 움직인다. 이 공식을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실천하는 지식인’이란 표현을 쓸 수도 있다. 물론 그녀가 절실히 원하는 역할이지만, 행위의 주체와 사고의 흐름이 모두 그녀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공감(empathy)’이라 부를 수는 없다. 실제 그녀의 업무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이 주다. 하지만, BR에 대해 쓰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 안에서 결국 타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항상 타인을 끌어안고 산다 여기지만, 그녀 안에 있는 건 그녀이자 그녀가 만든 것일 뿐 타자의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행위의 강도가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알고 있다 여기는 것- 나타내며 반대의 경우가 성립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 알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두지 않고 무기력해진다. 그녀처럼 세계를 해석하고 반응한다면 아마 질려버릴 것이다. 그녀는 항상 지쳐 보인다. 그 피로감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 받는다.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지만 안다는 사실을 유지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도한 이미지에 고정시키기 위해 무기력함(‘피로감’이 아니다)을 숨기고 싶어 한다.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들은 그녀에게서 지워지거나 부정한 것으로 취급된다. 혹은, 적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약속된, 비교가능한 객관적 기표들의 세계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주관적 기의의 세계, 특히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내면에 대한 기의를 다룸에 있어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이란 기의를 보편적 기표로 환원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폭력의 발생은 예견될 수밖에 없다. 인간을 기표로 다루려면 극한의 섬세함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어쩌면, 애초에 기표로 해석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은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동일한 사건, 정보를 접했을 때 동일한 기표로 해석되는 대상만을 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그녀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잘 안다고 인정받길 원한다. 그러한 인정에는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녀가 안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객관적 기표들의 세계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학술적 세계'에서 그녀는 충분히 인정받는다. 그녀를 둘러 싼 갈등의 지점은 너무 많은 대상을 안다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에 있다. 특히 안다는 행위가 불가능에 가까운 인간에 관하여 말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녀의 앎에 동의하지 않는 주변인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를 다루는 방법이 관계를 다루는 그녀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안다는 것을 설득시키거나 인정받기 위한 짧은 과정을 거친 후 동의하지 않을 경우-실패 시- 무기력해지거나 적의를 갖는다.


 그녀가 타인의 관계들에 개입을 당연시 여기는 건 그녀가 사건-상황을 잘 알기에 공유가능한 객관적 정보, 기표들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것까지 주관적 기표로 코딩하여 타인에게 제시한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일하는 동안 그녀의 갑작스런 업무지시에 -나를 포함하여-몇몇의 동료들이 당황한 경험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녀로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자신이 제시한 바는 앎을 전제로 한,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치뤘던 선거 이후 그녀의 '사람들이 따라와 주지 않아 아쉽다'는 발언의 맥락은 이러한 인식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애초에 공적, 사적인 영역의 구분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가 세계를 '이분'하는 기준은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그녀의 앎에 동의하는 이는 가까워질 수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이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동료들이 그녀의 정체성에 맞추길 거부하는 이유는 타인을 자신의 앎의 영역에 포함시켜 다룰 수 있는 대상정도로 바라보는 것에 있다. 그녀가 소유한 지식은 그녀의 행동을 위해 정립되지 않은 정보무더기다. 지식을 소유하려는 강한 욕구는 인간을 하나의 기표로 다루려는 태도로 나타나며 사람은 그 무더기에 차곡차곡 쌓인다. 중재자, 상담자의 역할은 인간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행한 결과다.


 사람 간의 거리는 그녀에게 무의미하다. 그래서 주변인과 그녀와 일종의 암묵적인 긴장과 갈등이 형성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의 강한 주체성은 종종 그에 비견할 만큼, 존재의 근거를 위해 강한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영역에 있다 여겨지는 이는 자신의 일부로 끌어들이지만, 자신이 포함할 수 없는 이는 강력한 타자로 존재하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과정은, 본인이 원한 결과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주변인들 사이에 권력지형을 발생시킨다. 즉, 피아가 형성된다. 자신을 위협할 가능성이 없는 이에 대하여, 자신의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이에겐 ‘아는 것’의 행위를 반복하며 관계를 다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해선, 자신의 앎을 인정하는 이들에게, 그녀가 만든 타인의 정체성을 정보화해 유통시킨다. 이는 그녀가 가진 지위를 충분히 이용하는 것으로, 의도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럽다고 표현이 어울린다. 앞서 ‘중재자’의 역할을 소개했었는데, 유통의 과정은 타인들을 중재하는 과정에 주로 녹아들어 나타난다. 다만, 그녀가 만드는 타자의 정체성이란 건 결과적으로 부정적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중심으로 한 피아의 권력지형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강한 독립성과 사랑의 형태를 볼 때 자신의 세계에서 안정하고 싶은 욕망이 존재함을 추측한다. 나는 그런 모습에서 그녀다움을 느끼곤 했다. 자신의 주변을 공고히 하는 행위는 그녀의 안정이자, 생존과 관련된 본능적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안정을 원하는 만큼이나 그녀는 특별해지고 싶어 한다. 그녀는 아마 이 내적 갈등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악의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 생각한다. 이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전략이고 갈등이니까. 다만, 언제나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은 특별해지기 위해 필요한 게 더 많을 뿐이다.


 동료들과 제주도의 바닷가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시멘트로 둑을 높이 쌓아둔 길이었고 바다 쪽으로 배정도 높이의 턱이 있었다. 밤이었고, 바다는 뭉글거리며 살아 있음만 볼 수 있었다. 바람도 제법 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어두운 바다를 보면 뛰어 들고 싶어. 지금 너무 참기 힘들어. 여러 명이 둑을 따라 걷던 중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어두운 바다에서 죽음의 충동을 발견한 듯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그녀의 쓸쓸한 웃음을 보며, 나 역시 깊은 쓸쓸함을 느꼈다. 죽음이란 내밀한 심연까지 드러내며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외로운 존재인가, 그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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