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03.
글을 쓰는 전문가가 있을까. 물론 '전문가'라는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게 돈으로 평가되는 세계에서, 글을 돈으로 바꾸는 이들, 글을 써 돈을 받는 이들이다. 직업적 글쓰기를 하는 이들. 그럼 그들이 돈을 버는 도구로 사용하는 글은, 좀 더 비싸거나 레어템으로써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좀 더 좋은 붓, 좀 더 비싼 악기가 필요한 것처럼 좀 더 비싼 연필이나, 공책, 혹은 좀 더 비싼 노트북이나 소프트웨어를 쓰면 더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왜 누구의 글은 돈을 받고 누군가의 글은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직업, 취미로 글을 써 용돈정도를 버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써서 밥을 벌어 먹는 사람들이 쓰는 글은 어딘가 다를까. 나도 여기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 말이다. 왜 글을 뭔가 특별한 것으로 다루어야만 하는 것인가.
며칠 전, 글을 쓰는 전문가라 부르는, 그렇게 불러지길 바라는, 글을 무엇인가 특별한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작가'를 만났다. 글은 예술행위를 위한 도구로 좀 더 섬세하게, 애틋하게, 때론 강하게 다루어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가, 글은 독특해질 수 있을까. 되새기자면, 다독, 다작, 다상량은 글을 쓰기 위한 기본이다. 이 세 가지 것으로만 글을 쓸 수 있다. 혹시 당신은 일기를 쓰는가, 혹은 어디에 블로그를 만들어 본 영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거나 여행에 대한 후기를 남기는가.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아주 쉽게 다루고, 각 종 미디어를 통해 쉽게 노출하고 쉽게 유통시킨다. 글쓰는 행위는 실시간으로, 거의 셀 수 없을만큼 수많은 이들이 전세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행위다. 글을 쓴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글이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형식을 갖출 때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똑같은 캠버스에 색을 칠하고, 나무와 돌을 파내어도 누군가가 만졌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흔히 미술이라 부르는 영역에 해당하는 기술을 익힌 이들은 그것을 훈련하지 않은 이들에 비해, 같은 재료를 가지고 평범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같은 기타를 가지고, 내가 내는 소리와 수년 간, 혹은 그것으로 밥 벌어 먹는 이가 내는 소리와 소리를 내는 종류, 기술은 차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이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은, 글을 재료로 하여 특정한 행위를 목적으로-흔히 예술이라 부르는 것일 수도- 훈련을 거쳤을 때 글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글 자체는 아주 보편적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글을 쓰기 위해 강요 받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다. 글을 쓰는 훈련이란 건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다. 글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훈련이란 건, 글을 재료로 하는 특정 영역에 해당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지, 사실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것과는 성격이 좀 다른 이야기다.
내가 만난 전문가는, 글을 쓰는 전문가지만, 사실 글을 다루는 예술적, 특정 영역에 대한 전문가였다. 글을 쓰는 행위에 있어 전문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소설, 수필, 시, 에세이, 어떤 종류의 논문 등 글을 형식에 맞게 쓰는 것에 대한 전문가지, 글을 쓴다는 보편적 행위에서의 전문가는 아니다. 어떤 보편성, 보편적 행위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 뭔가 보편성을 뛰어 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시화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함을 달성하는 일이다. 그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위대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이야기한 글은 특별하게 다뤄지는 것이지, 위대하게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 영역에 있어 아주 많은, 위대한 이들이라고 부를 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특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위대하다. 그들은 특정 영역에 대한 뛰어난 기술, 테크닉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 위대함을 달성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어떤 보편성과, 그 보편성을 한층 높게 만드는 결과물을 통해 위대함을 획득한다. 뒤샹의 <샘>도, 피카소, 마티즈도 미술을 함에 있어 테크닉이 뛰어나기 때문에 위대하다 평가 받지 않는다. 왼 손으로 기타를 들었던 지미 헨드릭스의 테크닉은 위대했지만, 그 테크닉을 지금 시대의 많은 이들이 따라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들은 지미 헨드릭스만큼 위대해질 수 없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마야는 지금 시대의 어떤 화가가 훨씬 더 아름답게 그려낼 수도 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보편성에서 무엇인가 뛰어 넘는 것을 구현해냈고 그건, 단지 그 영역에 특정된 기술을 뛰어 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획득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결국 그 보편성은 특정한 예술의 한 영역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을 담아 내고 있다.
결국 '기술'은 시간과 비례하여 획득할 수 있다. 행여, 그 시대의 기술을 뛰어 넘는 기술을 발견해낸다 해도 그것은 숙련된 기술에서 발생하기보다 그러한 기술을 발견하도록 이끌어가는 이의 '다상량'이다. 누구나 글을 쓰지만, 글이 보편적인 생산물의 의미 없는 것 하나로 묻히는 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 음악, 글, 연극, 영화, 특정할 수 없는 영역의 예술들이 역사에 기록되는 순간은 형식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형식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 가를 평가 받았을 때 가능하다. 다독, 다작, 다상량은 서로 떼어 낼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다상량을 고르겠다. 다독으로 자연스레 다상량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의미 없이 다독하는 이가 많지만, 조금 더 나아가 그 작품이 쓰여진 기술을 탐독한다해서 다상량은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다작할 수 없다. 다작은 기술을 단련하는 훈련과 같다. 그 훈련은 특정 영역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해내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위대함을 달성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형식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틀 안으로 넘치는 것을 가두려 한다면, 포함되지 않는 것은 결국 자르거나 버릴 수밖에 없다. 충분히 넘치게 만들고 이후에 틀을 갖춰도 무리가 없다. 특히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다. 글로 이루어지는 특정 영역의 예술은,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이고, 글은 생각의 도구, 표현의 도구다.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다. 글이야 말로 모두 다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이의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달성할 수 있는 '위대함'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우리는 특별함보다, 위대함을 위해 글을 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