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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7.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이야기가 뜨는 걸 보니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1.


소설 쓰기에 입문할 때 잘 쓰인 작품을 필사하며 연습하는 방법이 있다. 신경숙이 대표적인 케이스. 나이가 좀 차서 문창과를 다녔는데 젊은 이들의 '재기'를 따라갈 수 없어 우직하게 필사를 시작했고, 어느 날 오정희의 단편을 필사하다 '그분'이 오셨다는 이야길 들었었다. 그 후 성공한 작품을 써냈고, 콧대가 높아져 터치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었다고.


뗀 첫발이 필사였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고, 방송작가 시절 좋은 글귀를 대본에 쓰던 습관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손에 베인 습관이 흘러나온 게 아닐까란 생각.



2.


신경숙 표절 건이 더 공분을 사는 건 그 동안 알면서도 쉬쉬했다는 거다. 신경숙이 하이클래스 작가이고, 이런 잘나가는 작가를 문단의 어른'들이 건드려 말썽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아 곪았다는 주장이다. 분위기가 그렇다는 건데 내가 작가나 관련 업에 종사하는 게 아니라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찧기 뭐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예전에 일을 쉬며 글이나 또 써볼까 싶어 들을만한 수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문학상 준비반이란 게 있더라. 놀랐다. 어떻게 써야 상을 받을 수 있을지 방법이 있다는 소리다. 현 작가가 한 두 달? 정도 클래스를 운영하고, 적지 않은 비용을 책정해놨던 기억이 있다. 책도 못내고 그저 지망생에 불과한 예비작가들 주머니 사정이야 뻔할 텐데, 서글프고도 좆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 바닥이 망했구나.


이후에 현업 소설가가 하는 수업을 하나 들었다. 한겨례문화센터에서 하는 그런 강좌였는데, 모르는 작가였다. 문체에 관련된 수업이었고, 그 여류작가는 문체가 좋기로 그 바닥에서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다 했다. 수업 몇 번 듣고 과제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거나 '묘사'해서 써오라고 했다. 소설 형식을 빌어 병원 대기실을 묘사하는 글을 써 갔고, 이내 비평 시간이 진행됐다. 이래서 안 되겠구나를 다시 한 번 느낀 순간이었는데,


과제는 자유형식으로 묘사를 해오라는 거였지, 소설을 쓰라는 게 아니었다. 나도 소설을 쓸 생각이 없었고, 소설형식을 빌어 쓰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그 작가는 갑자기 주인공은 몇 살이며, 배경은 어떻느냐, 병은 무엇이냐, 입원을 했던 경험이 있느냐, 이 병원은 또 어떤 병원이냐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게 소설의 기본이라고. 그날 따라 유난히 전부 소설처럼 과제를 해왔는데 다 마찬가지였다.  


수업의 분위기는 그저 그랬다. 내가 왜 그 공간을 묘사했고, 무엇을 묘사하려고 했는지도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런 게 소설이라고, 소설을 쓰려면 그런 기본을 갖추어야 쓸 수 있다고 했다. 수업이 끝난 후 눈 인사만 나누던 한 두 명에게 잘 읽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내입으로 이야기하기 그렇지만, 내가 쓴 과제 수준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음 수업 시간, 그 소설가는 다시 소설을 쓸 때는 원래 그렇게 한다고 입을 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틀에 맞춰 작품을 갈아 내기 시작하면 결국 아무런 생명력도 없을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말이다. 소설을 잘 쓰는 방법이 정해져 있고, 그걸 심지어 '수상'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다는 거다. 대학 시절 비평문을 쓰고 꽤 날카로운 비평을 나누던 수업이 있었다. 비평문은 사실관계와 논리가 가장 중요하니 꼼꼼히 따질만한데, 소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소설도 예술 장르로서 엄격한 형식이 있지만, 소설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심지어 '소설'이란 형식은 개화기 시절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이다. 


예전 어디서 봤던 실험 결과에서, 같은 문학 동아리의 크리틱 방법을 단점을 강조하는 집단과 장점을 응원하는 방식의 두 집단으로 나눴고 10년 후 쯤 장점을 응원하던 집단이 더 좋은 작가들을 배출했다는 걸 보았다. 내 생각이 바로 이 실험 결과와 동일하다. 누군가에게 굳이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단점보다 긍정적인 점을 강조한다. 그게 사람마다 다른 개성이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단점은 여러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기준'에 부합하지 않거나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걸 지적하는 행위이다. 


우리 나라에 판타지, 웹툰, 영화 시나리오 바닥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재밌는 아이디어가 많은 건, 순수문학으로서 강조된 '소설'이 진입장벽을 높여 개성을 질식시켰기에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난 결과다. 3~4년 전 젊은 작가상이란 단편소설집을 사 읽다가, 덮고, 잊을만하면 다시 열다 읽다 덮고를 몇 번 반복 끝에 겨우 다 읽어냈다. 상을 받은 작품들이 당대 소설의 형식에 부합할지 모르지만, 읽어낼만한 서사나 재미를 느낄만한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 파이가 적어지면 기존 조직은 보수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있는 거라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 악순환으로 고인물이 되고 조직은 퇴보한다. 소설판이 딱 그 꼴이다. 기존의 작가들은 소설의 형식을 강조하며 개성을 갈아버리기 급급하고, 그로 인해 거세된 재미는 다시 소설의 파이를 작게 만든다. 수상 타이틀이 없으면 작가 타이틀을 달 수 없으니 '원로'들이 권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은 딱 좋게 갖춰져 있다. 



3.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건 기록의 목적도 있지만, '재미'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소설의 형식이 없어도, 우리 나라는 오랜 기간동안 다양한 형식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왔다. 소설의 문체를 읽는 맛도 중요하지만 좀 더 이야기의 본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신경숙이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이 있다면 굳이 다른 이들의 묘사를 표절하면서까지 문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리고 신경숙이 문단에 없더라도 그 뒤를 받쳐 줄 젊은 작가들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면 신경숙의 표절을 이렇게 쉬쉬하며 덮지 않았을 텐데. 건강한 조직이라면 이런 문제를 쉬쉬하며 넘어가려는 윗대가리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지 않을 텐데. 


신경숙 얘기 짧게 기록하려 했는데 느닷없이 너무 길어져 두서없지만, 이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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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2.



이 책을 읽으며 혼란스러웠던 건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이론이기 때문이었다. 헤겔부터 시작된 인정투쟁의 아이디어를 현대로 끌고와 논하고 있지만 저자가 말한대로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투쟁이란 아이디어는 범용성이 크다 생각했다. 역사나 문명의 연대기를 서술하기엔 적절하지 않아 보이지만 현대사회로 다가올수록 인정투쟁이란 이름을 붙일 만한 사건이 다양해진다. 책에서 말하는 디테일은 현실에 적용했을 때 수정-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느꼈지만 인정투쟁 개념 자체는 유용한 도구임에는 분명하다.


인정투쟁의 구도는 상당히 단순한데,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책모임의 한 명은 번역이 거지 같아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했다고 한다. 번역 때문에 항의전화를 한 건 이번이 두 번째라고. 악셀 호네트 밑에서 공부했다는 두 명의 유학파는 스승의 대표작을 국내에 소개하는데 보람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어 실력이 그 모양인 건지 원서를 번역하기가 정말 힘들어 책을 그 모양 쓴 건지 알 수는 없다. 꼼꼼하게 헤겔과 미드를 전반적으로 분석했으나 '무시' 파트를 빼면 특별이 더해진 게 없어 빈틈이 많은 이론이었고, 번역도 엉망이라 읽는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추천할만한 책은 또 아니었다. 범용성이 높아 어떤 사건에 적용할 수 있을지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책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이 제시되지 않아 오히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듯도 하여 인정투쟁이란 용어사용을 자제하는 편이 좋겠다란 생각도 했다. <인정투쟁> 외에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대담집을 읽어보면 인정투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예상된다.


읽으며 스스로 흥미로웠던 점은 인정투쟁의 실패나 부정적인 면이다.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의 밝은 면, 공동체 발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연하지만 인정투쟁이 긍정적인 합목적성을 갖지 않을 수 있고, 당사자의 사익 추구의 발현이 인정투쟁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인정투쟁의 '그림자'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개인이 인정투쟁에 지속적으로 실패할 경우 자살에 다다른다. 단순히 죽음에 이른다고 표현하면 자살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살지 않는다. 결국 인정투쟁은 타인과 관계맺기인데, 모든 관계맺기에 실패해 고립되면 <인정투쟁>에서 말하듯 개인의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없어 자살하는 것이다. 고립되기 전 고립될 것이라는 공포감이 자살로 인도할 수 있다. 이 경우 타자들이 관계를 맺고 싶어하리라 예상된 '나'의 조건을 채울 수 없다는 판단이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미드가 말하는 '목적격 나'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의 사회문화, 교육시스템, 미디어 등은 정상적인, 성공적인 '나'의 모델을 공고하게 만들고 빠르게 확산시킨다. 종교의 교리처럼 개인은 사회적으로 제시된 '나'를 모방하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고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모델은 강력한 사회적 규범으로 작용하고, 인정투쟁의 목적이 된다. 개인의 정체성은 비교나 경쟁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명확한 목표 지점이 정해지면 비교와 경쟁이 시작된다. 그 길 밖은 낭떠러지다. 밀려날 걸 예상해 스스로 떨어지는 건 자살 본래 의미와 맞닿아 있겠고, 다른 사람에게 밀려 떨어지는 건 요즘 자주 접하게 되는 '사회적 타살'이란 용어와 맞닿아 있다. 레이스 주최 측은 '모든 낙오는 스스로 떨어진 것'이라는 룰을 만들어놨기에 '낙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인 예는 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학교폭력이 주목을 잠깐 받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곪아 있었다. 학교는 내부를 지키는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라 내부를 가두는 울타리다. 그 안은 세계는 자연상태의 정글과도 같다. 힘 있는 자가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더 큰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돈, 폭력, 부모의 후광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힘의 조건들이 학교 울타리 안에 적용된다. '어른들의 세계'에 적용되는 생태켸 법칙과 다를 바가 없다. 강할수록 살기 쉽고, 약할수록 잡아먹히기 쉽다. 돈, 폭력, 부모의 후광 등이 유용한 인정투쟁의 도구임을 깨닫고, 사용 후 실제로 큰 인정을 획득하게 된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학교 폭력에 가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적 또한 인정투쟁의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학교 생태계에서도 마찬가지, 지속적인 인정투쟁의 실패는 자살로 귀결된다. 




00.


책 뒤 새로 써넣은 부분에서 악셀 호네트는 미드와 결별했다고 선언한다. 내가 이 책을 왜 읽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드 자리에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 등 정신분석학을 집어넣어 공동체가 아닌 개인에 더 집중하는 건 어떨까도 생각해봤으나 '제3의길'을 추구하는 저자의 생각과 동떨어지게 될 것이라 아이디어로만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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