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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9.



1.

 

나의 페이스북엔 직장이나 어디 소속되어 있는 단체를 표기해놓지 않았지만, 직장도 있고 후원하는 곳도 있고 과거 내가 지나온 발자국까지 더 하면 내가 속했고, 속해 있는 집단은 꽤 많다. 그리 넓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 오지 않았음에도 이것저것 따져 보면 꽤 된다. 나의 이름에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이름'들이 쭉 늘어져 있지만 기실 그 이름들과 깊은 관계도 맺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수사로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따져보면, 내가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지만 이름이 필요해서 관계를 맺은 곳도 있는 것 같다. '000 누구누구'는 나를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는데 아주 편리한 수단, 장치다. 그래서인지 원하는 이름을 얻어낸 경우도 있지 싶다. 

 

나에게 달려 있는 이름들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종류와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과거에 깊은 관계를 맺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버린 이름들도 있다. 사용하는 건 내 선택이다. 과거 상태를 표현하는 '前'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간편하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이름을 쓰지 말아야 겠단 생각이 들어 내 스스로 자격을 박탈했다. 이제 과거처럼 끈끈함을 느낄 수 없고 아쉬움 같은 감정도 사라진 이름이지만 한 때 열렬히 그 이름을 과시하고 싶었던 시기도 있다. 애정도 있었고, 그러한 이름을 달 수 있단 사실을 내심 기뻐하고 뻣대기도 했다. 더 이상 쓰지 않을 이름이란 판단이 섰음에도 한참을 가지고 있던 이름이다. 한 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배인 이름이 었기 때문이다. 투자가 많으면 미련이 커 발 빼기가 어려워진다. 대부분은 한갓 추억에 불과하니 조금이라도 털어버리는 게 낫다.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 안 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내가 그 이름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이 사회에 속해 있단 소속감을 갖게 해준 기억 때문이다. 뭐 어떤, 어느 시기에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순간이 있었다. 맺어 왔던 관계들이 날라가고 내가 스스로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은 홀로 무척이나 고단하게 보냈다. 어느 정도 시간동안 나의 방은 섬이 되어 아무도 올 수 없고 나 또한 나갈 수 없었다. 섬 안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 있을 수 없단 사실을 깨닫고 타인들과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해 이름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원하는 이름을 얻었다. 동일한 이름을, 수식어를 사용하는 이들 안에서 나는 타인의 존재감을 느끼고 나의 위치를 사람들 가까운 곳으로 나의 자릴 옮길 수 있었다.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같은 이름을 쓰는 이들 사이에 적대감보다 따뜻하다고 표현할만한 감정들이 많았다(이러한 감정들에 대해 논할 게 많지만, '긍정적인' 정도의 의미로 받아 들이면 되시겠다). 내가 타인들 사이에 섞여 있다,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한다, 관심을 주고 받는다, 나의 필요성과 존재감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금 확인한다, 이런 것들을 필요로 했고 필요한 바를 얻었다. 

 

내가 어딘가에 속해 동일한 이름을 다른 이들과 함께 사용하고 이를 통해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단 사실은 중요했다. 지금 그 때 얻었던 이름을 필요치 않게 된 건 당분간 나 홀로 섬에 머물 수 있을만큼 '체력'을 회복한 탓도 있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관계들이 새로이 생겼다 사라져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또 그 이름에 담긴 의미가 더 이상 나에게 뜻을 갖지 못하기도, 내가 가진 생각과 차이를 '발견'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차이를 느끼지 못했거나 예감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러한 차이를 무시할만큼 당시 나에게는 타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주된 목적이고 동기였다. 

 

인간은 내적인 불안감이 높아지거나 '체력'이 약할수록 외부에서 '이유'들을 찾곤 한다. 나에 대한 존재감이나 확신을 바깥에서, 타인을 통해 확인한다. 참을 수 없는, 어떤 사건-상황에 대한 인내의 한계점이 다다를수록 스스로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외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내적 체력이 약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공격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시선과 공격을 외부의 무엇인가로 향하게 한다. 외향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할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에 비춰보자면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라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으려 힘썼다. 자신을 탐구할 수 있는 에너지나 기력이 없어 자존감을 외부의 것들로 채워나간 것이다. 이는 다시, 사람들이 가진 수많은 이름의 무게와 각 자 그 이름을 달고 있는 이유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가장인가 장남인가 남편인가 딸인가 어머니인가. 당신의 직급은 대리인가 과장인가 사장인가, 직업군은 공무원인가 회사원인가 자영업자인가 백수인가 구직자인가. 사람들은 고유명사로서 자신의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에 맞는 캐릭터들과 연기력을 갖추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는 각 자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이름을 스스로 원해서 얻었든 강제로 받게 됐든 그 이름을 달고 있음은 나름의 이유 때문에 선택했고, 선택한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달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인가.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한 물적 증거와 논리적 사고는 인간의 수많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 삶의 갯수만큼, 살았고 사라진 삶의 양만큼 존재의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를 증명하고 이유를 찾는 것은 어쩌면 일일히 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을 수도 있다. '방법'이라 부를 수 있는 개념, 행위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존재의 이유를 찾는 비교적 쉬운 방법이 미리 정해진 이유를 습득하는 것이다. 내가 정한 이유보다 타인이 정한, 사회가 개인들에게 부여한 삶의 이유를 내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여러 선택 중 내적 체력이 허하는 만큼, 탐색-탐구능력이 허하는 만큼 이유를 살펴보고 나에게 적당한 이유를 '소비'하면 된다. 이게 내가 섬에서 나오며 선택한 방법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완벽하게 자신을 세우건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라캉을 빌리자면 이미 우린 상징계를 살아 가고 있기에 세계에 존재하는 이름을 차용하며 자신을 만들어 간다. 나 역시 '나'를 구별하기 어렵다. 내가 찾는 자아가 타인에게 맞추려 하는 것인지 내적 욕망에 의한 것인지 항상 의심한다. 이런 의심과 불안을 겪으며 내면으로 깊이깊이 내려 간다. 내면의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세계의 언어를 빌려오는 과정에서 또 다시 갈등이 발생하고 환원할 수 없는 풍경은 묘사 되지 않고 그 자리에 유적처럼 남아 있다. 그 공간은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를 갖고 만들고, 내적 공간을 세우고 소유하고 묘사하고 싶어 한다. 그게 본능인지 생존의 충분조건인지 모르겠다. 존재의 이유가 나에겐 삶을 연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섬에서 나와 다른 이들을 만나며 느낀 바는 그렇다, 그들도 역시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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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3.



글을 쓰는 전문가가 있을까. 물론 '전문가'라는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게 돈으로 평가되는 세계에서, 글을 돈으로 바꾸는 이들, 글을 써 돈을 받는 이들이다. 직업적 글쓰기를 하는 이들. 그럼 그들이 돈을 버는 도구로 사용하는 글은, 좀 더 비싸거나 레어템으로써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좀 더 좋은 붓, 좀 더 비싼 악기가 필요한 것처럼 좀 더 비싼 연필이나, 공책, 혹은 좀 더 비싼 노트북이나 소프트웨어를 쓰면 더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왜 누구의 글은 돈을 받고 누군가의 글은 돈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직업, 취미로 글을 써 용돈정도를 버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써서 밥을 벌어 먹는 사람들이 쓰는 글은 어딘가 다를까. 나도 여기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 말이다. 왜 글을 뭔가 특별한 것으로 다루어야만 하는 것인가.


며칠 전, 글을 쓰는 전문가라 부르는, 그렇게 불러지길 바라는, 글을 무엇인가 특별한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작가'를 만났다. 글은 예술행위를 위한 도구로 좀 더 섬세하게, 애틋하게, 때론 강하게 다루어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가, 글은 독특해질 수 있을까. 되새기자면, 다독, 다작, 다상량은 글을 쓰기 위한 기본이다. 이 세 가지 것으로만 글을 쓸 수 있다. 혹시 당신은 일기를 쓰는가, 혹은 어디에 블로그를 만들어 본 영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거나 여행에 대한 후기를 남기는가.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아주 쉽게 다루고, 각 종 미디어를 통해 쉽게 노출하고 쉽게 유통시킨다. 글쓰는 행위는 실시간으로, 거의 셀 수 없을만큼 수많은 이들이 전세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행위다. 글을 쓴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글이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형식을 갖출 때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똑같은 캠버스에 색을 칠하고, 나무와 돌을 파내어도 누군가가 만졌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흔히 미술이라 부르는 영역에 해당하는 기술을 익힌 이들은 그것을 훈련하지 않은 이들에 비해, 같은 재료를 가지고 평범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같은 기타를 가지고, 내가 내는 소리와 수년 간, 혹은 그것으로 밥 벌어 먹는 이가 내는 소리와 소리를 내는 종류, 기술은 차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이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은, 글을 재료로 하여 특정한 행위를 목적으로-흔히 예술이라 부르는 것일 수도- 훈련을 거쳤을 때 글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글 자체는 아주 보편적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글을 쓰기 위해 강요 받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다. 글을 쓰는 훈련이란 건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다. 글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훈련이란 건, 글을 재료로 하는 특정 영역에 해당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지, 사실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것과는 성격이 좀 다른 이야기다.


내가 만난 전문가는, 글을 쓰는 전문가지만, 사실 글을 다루는 예술적, 특정 영역에 대한 전문가였다. 글을 쓰는 행위에 있어 전문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소설, 수필, 시, 에세이, 어떤 종류의 논문 등 글을 형식에 맞게 쓰는 것에 대한 전문가지, 글을 쓴다는 보편적 행위에서의 전문가는 아니다. 어떤 보편성, 보편적 행위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 뭔가 보편성을 뛰어 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시화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함을 달성하는 일이다. 그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위대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이야기한 글은 특별하게 다뤄지는 것이지, 위대하게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 영역에 있어 아주 많은, 위대한 이들이라고 부를 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특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위대하다. 그들은 특정 영역에 대한 뛰어난 기술, 테크닉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 위대함을 달성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어떤 보편성과, 그 보편성을 한층 높게 만드는 결과물을 통해 위대함을 획득한다. 뒤샹의 <샘>도, 피카소, 마티즈도 미술을 함에 있어 테크닉이 뛰어나기 때문에 위대하다 평가 받지 않는다. 왼 손으로 기타를 들었던 지미 헨드릭스의 테크닉은 위대했지만, 그 테크닉을 지금 시대의 많은 이들이 따라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들은 지미 헨드릭스만큼 위대해질 수 없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마야는 지금 시대의 어떤 화가가 훨씬 더 아름답게 그려낼 수도 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보편성에서 무엇인가 뛰어 넘는 것을 구현해냈고 그건, 단지 그 영역에 특정된 기술을 뛰어 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획득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결국 그 보편성은 특정한 예술의 한 영역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을 담아 내고 있다. 


결국 '기술'은 시간과 비례하여 획득할 수 있다. 행여, 그 시대의 기술을 뛰어 넘는 기술을 발견해낸다 해도 그것은 숙련된 기술에서 발생하기보다 그러한 기술을 발견하도록 이끌어가는 이의 '다상량'이다. 누구나 글을 쓰지만, 글이 보편적인 생산물의 의미 없는 것 하나로 묻히는 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 음악, 글, 연극, 영화, 특정할 수 없는 영역의 예술들이 역사에 기록되는 순간은 형식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형식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 가를 평가 받았을 때 가능하다. 다독, 다작, 다상량은 서로 떼어 낼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다상량을 고르겠다. 다독으로 자연스레 다상량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의미 없이 다독하는 이가 많지만, 조금 더 나아가 그 작품이 쓰여진 기술을 탐독한다해서 다상량은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다작할 수 없다. 다작은 기술을 단련하는 훈련과 같다. 그 훈련은 특정 영역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해내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위대함을 달성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형식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틀 안으로 넘치는 것을 가두려 한다면, 포함되지 않는 것은 결국 자르거나 버릴 수밖에 없다. 충분히 넘치게 만들고 이후에 틀을 갖춰도 무리가 없다. 특히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다. 글로 이루어지는 특정 영역의 예술은,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이고, 글은 생각의 도구, 표현의 도구다.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다. 글이야 말로 모두 다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이의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달성할 수 있는 '위대함'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우리는 특별함보다, 위대함을 위해 글을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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