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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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은 결혼한 남녀 간 혼외정사를 일컫는다. 누굴 짝사랑한 걸 가지고 '불륜이야'라고 표현하진 않는다. 그럼 사랑과 전쟁은 19금이 아니었을테다. 불륜이란 단어는 결혼제도를 어기는 것에 대한 표현이지만 불륜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사회적 '제도'를 넘는 것에 있다. 어렸을 적 초인종 벨을 누르고 튀었을 때 느꼈던 감정 중 하나처럼 하지 말라는 짓을 할 때 느끼는 쾌감이다. 그리고 구별이 필요한 건 불륜을 보며 관음증과 같은 쾌감을 얻는 것과 직접 불륜를 하며 얻는 쾌락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옳다 정해진 선을 넘으며 느끼는 쾌감은 전자의, 남의 불륜을 엿보며 즐기는 것과 유사하지만 직접 불륜의 당사자가 됐을 때는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다. 당신의 눈 앞에 지금 매력적인 여성이 있다. 결혼을 했든 애인이 있든 이성에게 '시선'을 빼앗길 가능성이 높다. 시선은 누구나 뺏길 수 있지만, 성적 욕망이든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욕망을 느끼든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와 상상을 하는 경우는 다르다. 직접 성교를 해 얻는 쾌락은 야동을 보며 자위를 하는 쾌락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행위의 주체로서 객체가 돼 주체의 입장을 상상하는 건 미디어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만족을 얻는 행위와 유사하다. 자극적인 컨텐츠일수록 인간에게 잠재된 본능적 욕망을 건드린다, 폭력, 섹스와 같은 기본적이며 가장 파괴적인 내용부터 최근엔 '아빠 어디가'처럼 가족의 관계를, '우리 결혼했어요'처럼 연예-결혼 관계를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이미지로 포장해 소비하게 만든다. 강민경이 면도기 광고를 하며 일본AV를 떠올리게 만든 카메라 워킹으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처럼 중요한 건 보는 이로 하여금 주체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컨텐츠를 만드는 이나 소비하는 이나 둘 다 객체일뿐임을 잘 알지만 둘 다 '주체로 착각하겠다'는 암묵적인 합의하에 컨텐츠를 만들고 소비한다.
우리가 만들어지는 사회적 정체성에 맞는 소비 컨텐츠와 그 이면 숨겨진 욕망에 적절한 컨텐츠가 모두 유통되고 있다. 점점 더 모호해지며 숨겨진 욕구가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된다. 내면 깊이 사라지지 않는 욕망은 돈으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고 있다. 보이진 않지만, 공공연한 비밀 같은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숨기고 있고 돈으로, 혹은 각 자의 방식으로 숨겨둔 욕망을 해결하고 있단 사실을 시선이 닿지 않는 한 구석으로 미뤄 놓는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사실을 '비밀'로 치부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으로 숨긴다. 하지만 뻔하고도 우습게도 주변에서 일상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타인에게 드러낼 수 없는 욕망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행위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미디어, 법률, 통념상의 도덕 등 사회 전반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존재하지 않도록 꾸미고 부정적 의미를 부여해 개인적 욕망을 해소하려는 행위들을 비정상의 범주로 묶어 낸다. 개인의 삶에는 존재하지만 집단은, 사회는 인식에서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거세하려 하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듯 개인은 욕망을 스스로 꽁꽁 숨기기에 이른다. 욕망을 탐하며 사회와 타인의 시선에 동조에 욕망을 밀어 내는 모순 속에서 많은 이들이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은 타인과 얼마나 닮았느냐, 사회가 제시하는 올바른 삶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워지고 있느냐, 이러한 기준들이다. 그러한 집단성에서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삶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공고한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정체성은 개인의 욕망과의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의 해결 방법은 익히 배워왔던 집단성으로의 회귀다. 모두가 갈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갈등의 양상이 비슷하다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비정상으로 비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해소하는 것이다. 꼭꼭 숨겨진 개인의 욕망들은 서로 연결된다. 마치 생존과도 같은 일이다. 과거 정보통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 개인의 커뮤니케이션 범위와 형태는 단순했다. 자신이 실제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 외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몇 년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뮤니케이션의 시공간이 사라졌다. 이들은 더 쉽게 집단을 이뤘고, 더 다양하게, 더 크게 모이기 시작했다. 단지 모니터를 통해 주고 받던 활자는 전기신호를 넘어 일상 깊숙히 스며들어 가상 공간을 통해 타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음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의 사회가 됐다. 순간순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자제하지 않는다, 감정, 느낌, 상상, 생각 등은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가상의 공간에 기록한다. 많은 이들이 본다, 동의한다, 공감하며 동일한 이야기를 엮고 엮는다. 어느 새 또 다른 주제와 형식을 가진 집단이 모인다.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만큼이나 가상의 공간에서 상상 속의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얘기들이 많았다. 가상 공간의 관계는 왠지 진실된 관계가 아니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그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음을 최근 느낀다. 타인이 맺은 관계의 진실을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어떤 관계든, 관계는 존재하며 그 내용과 형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준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가능한 만큼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살아간다. 이제 많은 이들이 얼굴을 맞대지 않고 가상의 공간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가고 있다(이 모습이 더 진실된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비언어적(non-verbal) 요소가 언어적(verbal) 요소보다 더 많은 정보는 전달한다고 한다. 가상의 공간에 등장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은 비언어적 요소를 거의 배제하고 있다. 이에 부족함을 느꼈는지 이모티콘, 짤방 등 과거에 없던 형태의 '언어적 요소'들이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때로 나는 가상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편함을 느낀다. 원하는 정보만을 송출하고, 수신하고, 원하는 반응을 얻고 보내고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를 신경 쓸 것 없이 원하는 커뮤니케이션만을 취할 수 있다. 원하는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게 핵심적인 요소다. 원하는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가 된다. 개인이 커뮤니케이션의 대상과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건 개인의 욕망을 원활하게 투영할 수 있는 조건과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보다 가상의 공간이 더 솔직한 공간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 많은 이들이 가상 공간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