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4.
시네마 천국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사랑을 잃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영화, 미술, 음악, 춤 등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은 예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성공했다 생각한다. 우리가 언어에 구속되어 살지만 언어를 벗어난 광대한 세계를 안고 살기 때문이다. 언어에 구속 받지 않기 위해 여타 예술은 발전 했을지도 모른다. 시네마 천국은 언어로 옮길 수 없다. 그런 위대함을 지니고 있다. 몇 마디 말로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이 들어 있다. 광대한 세계를 가지고 있기에 많은 이들이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 영역은 넓기 때문에 각자가 느끼는 바도 다르다. 바다 건너 만들어진 영화가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이에게 어떤 감동과 영감을 준다면 그 안에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넓은 무엇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몇 편 고르라면 시네마 천국을 고르겠다. 단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지금은 시네마 천국을 고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인간의 삶이 통째로 들어가 있는 작품을 좋아 한다. 그런 작품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다룰 수밖에 없으며 특정한 사건에 집중할 수 없다. 인간 모두에게 통용될만한 보편성을 다루어야 한다. 삶과 죽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들어갈 말이 있다면 그건, 사랑이다. 인간은 죽는다. 이런 숙명 앞에서 인간은 왜 삶의 고난을 선택하는가. 그건 사랑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가치 있는 몇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이란 건, 다른 것으로 교환할 수 없는 것이다. 여타의 것이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하고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 본 일이 있는가? 추상적 명사들이 그렇듯 사전적 정의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해석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정의는 어쩌면, 인간의 개체수 만큼의 정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을 위대한 것으로 분류하는 것일지도. 삶과 죽음에 대해 당신은 어떤 정의를 내리겠는가. 언어로 채울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다.
시네마 천국은 이미, 영화적으로 해석된 영화일 것이다. 물론 난 찾아 보지 않았다. 영화 장면마다 맺힌 위대한 아름다움을 타인의 언어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시네마 천국은 나의 것이다.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시네마 천국은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군대를 갔을 때 내 입에서 준비도 없이 시네마 천국 이야기가 튀어나온 적이 있다. 한 여름 예초기를 들고 사격장 잔디를 깍을 때 한 선임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21살에 불과했던 나는 사회 경험도 전무했기에, 급작스럽게 시네마 천국 이야기를 내뱉었다. 영원히 반복되도 영원히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그 장면에 대해 말했다. 알프레도와 토토가 어느 집 문간에 걸터 앉아 99일 동안 공주를 기다린 병사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영원과도 같다. 재밌는 이야기를 시킨 선임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시네마 천국이란 영화에 나오는 건데, 공주를 사랑한 일개 병사가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공주의 창 밑에서 100일 동안 기다리기로 했다고, 공주가 100일 동안 그 자리에 있는다면 사랑을 받아 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99일이 되던 날 병사는 떠나 갔다. 병사는 왜 떠나간 것일까. 순발력이 별로 없는 나는 어떻게 그런 말을 지어낼 수 있었을까. 나는 이런 질문을 만들어 붙였다. 병사가 99일 째 떠난 이유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당신의 사랑 스타일이라고. 누군가는 사랑이 두려워 회피했을 수도 있고, 사랑이 너무 고되 포기했을 수도, 생각해보니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그게 답한 이의 사랑에 대한 태도란 것이다. 물론 아무런 근거 없다. 무슨 인터넷 연애 심리 검사와 같은 걸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럴 듯하게 넘어 갔다. 내가 생각해도 놀랍다. '인생순발력'이다. 잘 넘어간 이유는, 병사가 왜 떠났는지 쉽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프레도는 자신도 모르니 토토에게 알게 되면 왜인지 말해 달라고 한다. 나도 그 시절에 궁금했다. 뭘까. 다른 얘기지만, 그 시절의 나는 시네마 천국을 왜 좋아 했던 걸까.
토토는 엘레나를 만난다. 지금의 나라면 이런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90일을 꼼짝 않은 그 병사는 눈물도 마르고, 눈도 감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90일 동안 고통을 견디다 99일 째 떠난 건, 사랑은 그렇게 괴로운 것이니까. 사랑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하지만 눈물샘을 마르게 하고 더 이상 울 수도 없게 만들며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게 만든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소유할 수 없다. 99일을 기다린 육체의 고통 따윈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토토는 몇 달 동안 엘레나의 창 밑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엘레나는 토토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 해 마지막 날 새해가 되던 그 시간에 토토는 엘레나의 창 밑에서 기다렸지만, 엘레나는 창문을 굳게 닫는다. 토토는 절망한다. 자신의 공간인 영사실에 돌아가 정성스레 X자 표시를 한 달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그 때 엘레나가 나타난다. 토토와 엘레나의 '100일'이었다. 그 순간 Love Theme가 흐른다. 바이올린 선율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어떤 비극적 감성을 자극한다. 둘은 사랑한다. 사랑하지만 둘은 만날 수 없어 떨어져 지낸다. 비오는 날 엘레나의 마지막 키스는 아름다웠다. 아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연인의 키스가 있을까. 그 이후 둘은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게 된다. 토토는 30년이 지나 고향에 돌아와 그 시절 엘레나의 영상을 보며 눈물 짓는다. 사랑은 그렇다. 토토는 고향을 떠난 이 후 사랑을 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창 밑에서 공주를 기다린 병사의 '100일'은 그런 것이다.
99일 째 사랑을 완성시키지 않는 게 좋을까. 100일을 채워야 하는 것일까. 하룬데 당연히 기다린다는 그 말도, 사랑이 지워주는 그 무게를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99일 째 떠난 병사는 나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공주와의 사랑은, 앞선 99일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줄 것이다. 난 시네마 천국의 OST 중 Love Theme를 가장 좋아한다. 지금은 울음이 차올라 듣기가 어렵다. 이 글을 쓰며
OST를, 소음을 완전히 차음하기 위해 이어폰으로 듣고 있다. Love Theme는 아름답지만, 전혀 아릅답지 않다. 마치 사랑처럼 말이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만드는 이 음악은, 말 그대로 Love Theme다.
사랑은 부재할 때 더 체감한다. 토토는 엘레나를 잃고, 그 긴 시간동안 그녀를 그린다. 고향에 돌아와 엘레나의 영상을 되돌려 보는 나이든 토토의 표정은 첫사랑의 아련함을 담은 표정이 아니었고, 그 아련함에 대한 눈물도 아니었다. 그건 사랑에 대한 눈물이다. 나를 떠난 그녀는 남자들은 유독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다고 말했다. 아니. 그건 첫사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었기 때문에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게 무엇이든 삶에 각인됐기 때문에 망각할 수도 도려낼 수도 없다.
사랑은 아름답고 따뜻하면서 위험하고 폭력적인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란 말은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자살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만드는 사람들. 예전엔 그들을 비웃었고 공감할 수 없었다. 그저 의지가 나약하다고만 생각했다. 사랑이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면, 사랑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즘 같은 때 토토 같은 캐릭터는 고리타분하다. 단 한 번 사랑의 기억이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느냐고. 그런데 사랑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보편성이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때 주저했다. 나에게 사랑은,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좌우할 수 있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느냐 마느냐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사랑 앞에서 나는 무기력했다. 그녀가 나에게 헤어짐을 통보하고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넌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랑한다면 나를 버릴 수 없으니까. 답을 알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나만의 의미로 사랑이란 단어를 계속 사용했다. 그녀에게 쓰지 않던 그 단어를,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끊임 없이 사용했다. 그녀가 내게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난 사랑한다고 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나를 사랑하냐고 물엇을 때,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나는 그 단어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사랑을 감정의 총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나에게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사람에게 배웠다. 사랑은 행복감을 주지만 그에 못지 않는 격한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예민하게 만든다. 작은 것 하나까지 의미를 붙이고 감정적 대응을 한다. 사랑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까. 사랑은 극과 극, 긍정적 감정부터 부정적 감정까지 포괄하는 단어다. 사랑이 통념상, 긍정적 의미만을 내포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면 사랑이 야기하는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쉽게 손을 놓을 수 없는 일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 믿게 만드니까.
나와 그녀는 서로 다른 시기에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서로 다른 단어의 정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맹신하면서도, 나에게 사랑이란 단어는 적대적이었다. 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까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말은 절대적 지위를 차지한 말이 었지만, 그녀에겐 연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정도의 그런 말이 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연애하는 동안 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고, 헤어진 이 후에 나의 사랑에 대해 어렴풋하게 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사랑에 대해 모른다. 애초에 그녀가 사랑이 뭔지 모른다 말하기도 했고, 나를 사랑하는 것도 같았지만, 나를 만나며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 말하는 그녀의 사랑은, 나와 그녀의 사랑은 서로 다른 사랑이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들었던 생각은, 내가 울고 싶은 게 아닐까란 생각이었다. 나름 진심을 담아 울었던 사건의 거의 없다. 20대에 들어와서는 없던 것 같다. 나의 눈물에 대해 기억하는 건 아주 옛날 일이다. 어렸을 때,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손오공 만화가 있었다. 우주선을 타고 다니며 악당을 무찌르는 그런 내용이다. 그 만화가 끝날 무렵 공주를 구하기 위해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가 죽음을 예비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마무리가 어떻게 됐는지 못 봤다. 그 부분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 소리 죽여 끅끅 울었다. 마침 집에서 나를 돌보던 할머니는 자고 있었고, 나는 들키지 않게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만화를 다 보지 못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쯤인 것 같은데, 캐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은 퍼펙트월드란 영화를 보고 또 서럽게 울었었다. 그 때 정말 울었었다. 집에서 티비를 통해 봤었는데, 캐빈 코스트너의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눈물이 나 참을 수 없었다. 마지막 캐빈 코스트너가 죽는 장면일 때 다시 화장실로 가 몰래 숨죽여, 진심으로 울었다. 그냥 너무 슬펐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네마 천국도 대학교 1학년 때 쯤 티비를 돌리다 보았던 거 같다. 엔딩이 너무도 유명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그 엔딩이 나왔을 때 정말 울고 싶었다.
토토가 성인돼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부터 엔딩이 떠올라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휴일의 극장이라 사람들이 몇몇 더 있었다. 눈물이 나지 않게 참았다. 아무도 없었다면 이미 그 때부터 울었을 것 같아.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고 턱이 덜덜 떨릴 때까지 울고 싶었어. 울음이 터지지 않게 참았지만, 참지 않았다면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울음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울음은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걸 알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억지로 물을 들이키며 끝까지 봤다. 끝나고 화장실에 가서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고, 눈가가 살짝 부어 누가 봐도 운 얼굴이었다.
왜 울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있다면 시네마 천국을 사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내가 왜 그녀를 사랑했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의 이유를 알았다면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성이 아니다. 보이지 않고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광대한 영역의 것이다. 시간은 기억을 왜곡하고 감정을 바꿔 점점 내가 그녀를 사랑했던 걸까 의심하게 될 것이다. 아마 지금 생각하기에 사랑했던 거 같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 때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라며 지금의 기억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 시점까지 시계를 돌리고 싶다.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은 그때가 될 시간으로 가고 싶다.
이번에 다시 시네마 천국을 보며 알프레도의 고통을 느끼게 됐다. 알프레도가 토토를 떠나 보낸 기차역 장면은 커다란 고통을 담고 있었다. 알프레도는 토토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의 삶이었다. 토토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도,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었다. 그런 토토가 돌아왔지만 그는 냉정하게 토토를 떠나 보낸다. 아무런 아쉬움도 후회도 없는 얼굴로 잔인하리만큼 토토를 떠나 보낸다. 그리고 토토를 위해 30년 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의 일부를 그렇게 떠나 보낸 이의 삶은 어떠 고통으로 얼룩질까. 고통이란 단어로 담아낼 수 없는 크기의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리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헤어지고 다시 연락해왔다. 다른 남자를 만난다며 떠났던 그녀가 나에게 힘들다며 다시 연락한 것이다. 잠시 동안 그녀가 나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를 버린 그녀는 이별이 필연적으로 남긴 상처를 견디기 위해 나에게 다시 연락한 것이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나를 이용한다는 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도구로 쓰여도 좋다 생각했으니까. 오래지 않아 버려질 도구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사랑은 불가항력이다. 나는 헤어짐의 순간보다 더욱 고통스러웠고, 사랑의 감각을 더 절실히 느꼈다. 온갖 감정이 깨어나고 날이서 나를 상처냈다.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지쳤다. 그녀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다시 떠났다. 나는 계속 그자리에 있는다.
그녀의 몸이 생각난다. 나의 입술에 닿았던 그녀의 몸이 미칠 듯 그립다. 그녀의 몸매와 다리는 별로였다. 요즘 각선미를 뽐내는 여자들, 몸매가 섹시한 여자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녀를 안고 싶다. 절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른하게 그녀를 안고 있는 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뜨거워진 그녀 몸을 품에 안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 동떨어져 살아 가는 나이지만, 나 역시 인간이기에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타인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라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 말했다. 그녀의 온기에 취해있던 나는 현실감각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잔인하게 나의 환상을 모두 깨뜨렸다. 이제 다시 그녀를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이 싫다.
내가 좀 더 이기적이었다면,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그녀와 섹스라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나의 고통은 여전히 이어지겠지만 지금은 그녀를 탐하고 싶다. 운동을 하면 연습을 한다. 몸에 움직임을 새기기 위해서다. 이미지트레이닝과 이해와는 다른 육체의 영역이 있다. 나는 지금 나를 만지던 그녀의 손길을 기억한다. 다시 나의 몸을 만져주길 바란다. 부드럽고 장난스러운 그 손길로 다시 나를 만져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만질 수 없다.
다시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 사랑을 배웠을 때 그 고통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사랑을 배우고 싶었지만, 그렇게 고통스럽게 배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 지나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사랑은 또 다시 견디기 벅찬 상처와 무게를 남기고 떠났다. 그래서 다시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시네마 천국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 좋다. 그 어떤 연애 이야기보다 더 좋다. 나는 그래서 시네마 천국을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떠났을 때 더 이상 사랑만으로 사랑할 수 없는 시기가 됐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외면하고 지내고 싶었던 일이었고 회피해왔지만 어느 순간 나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더 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도 줄 수 있는 건 사랑이겠지만, 나에게 집도 일도 차도 안정된 미래 따위 하나도 없다. 누구는 나에게 낭만적이라 말한다. 사는 것도, 사랑도 낭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낭만은 나의 것이 되어선 안 되는 시기가 온 것이라 느낀다.
그녀에게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은 쉬워 보였다. 나는 연애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녀는 많은, 많다라기 보다 충분히 연애를 경험하고 남자를 만났다. 나는 그런 부분을 무시했다. 그녀에게 연애의 환상 같은 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감정에 솔직했고, 충동적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낭만이라는 것에 싸여 눈 앞의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 다른 여자를 만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지 싶지만 별로 자신이 없다. 첫번 째의 사랑과 이번에 겪은 일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드러내길 꺼려 한다. 블로그에 글을 쓸 수 있는 건, 내가 이 블로그를 하고 있단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배출구가 필요했고, 여기에 공간을 만든 것이다. 나는 타인에게 잘 공감하지 못한다. 사랑처럼 특정한 몇 개의 주제 외에는 별다른 감정적 동요가 발생하지 않는다. 행여 어떤 감정적 기복이 생겨도 그건 오롯이 나의 경험과 감각 때문이지 타인에게 공감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이런 생각에 빠져 더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나는 타인과의 거리를 두고 나의 공간에서 지낸다. 물론 사람들과 지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원하면 중심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를 숨기고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이다. 고독함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그녀와의 관계를 잃기 두려웠던 건 나만의 공간에 들어 올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선 내가 그리워하는 인간의 온기가 있었다. 그녀는 그걸 느끼게 해줬다.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 연애를 목적으로 만난 여자들이 있다. 누가봐도 미인들이었고, 매력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인지 고민했다. 결국 관계는 지속되지 않았다. 으레 그렇듯 나 혼자 지쳐 버린 것이다. 나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다 시간은 기다리지 않고 지나간다.
그녀는 나에게 지적인 만족도 자극도 주지 못했다. 취미도, 나의 관심 분야가 많아서 별 문제는 없었지만 딱 맞아 떨어진 것도 아니다. 그녀와 책을 읽고 대화한 적도, 함께 클럽에가 공연도 한 번 못 봤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내가 그녀에게 지적인 자극을 줄 수 있고, 다양한 취미를 소개할 수도 함께 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드러나도 괜찮은 사람을 원한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나의 공간으로 들어왔고 나는 주저할 틈도 없이 그녀 앞에게 내 공간을 열어줬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숨겼고 그녀와 어떤 거리가 존재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서 떠난 후에야 모든 걸 다 열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인 걸 알았지만 그녀에게 나를 열고 싶었다.
그녀는 나를 처음 만날 때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편안함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아 갔고, 나의 역할은 끝나 갔다. 그녀는 이제 현실에서의 안정을 원한다고 했다. 사실, 다 변명이겠지만. 나에 대한 애정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 믿고 싶어 그 말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질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뭔가 더 할일이 있길 바랐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사랑,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되버렸다. 그녀는 나에게 불안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사랑과 미래와 나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어느 정도 취한 채 이 글은 쓴다. 대학시절 굉장히 술을 많이 먹었고, 술을 잘 먹는 체질도 아니었기에 더 큰 부담이 되었는지, 몸이 꽤 망가졌단 느낌을 받고 술을 확 줄였다. 알콜중독은 아니지만, 술 좋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발버둥치지만, 알콜의존증 정도는 된 것 같다. 그 시절엔 술을 마셔야만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하고 즐겁게 놀았다. 항상 취해 있을 때가 있었다. 이젠 술을 많이 먹을 수도 없지만, 점점 술을 자주 찾게 된다. 술은 순간을 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글을 쓸 때 술을 먹지 않는 다는 건 나만의 원칙 같은 것이다. 술을 먹고 뭔가 끄적이는 건, 언어와 이성의 세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가끔 필요에 의해, 충동에 의해 술을 먹고 몇 마디 쓰기도 하지만 의미 없는 것들이다. 뭔가 적어야 겠단 생각을 하고, 술을 먹은 채 글을 쓰는 건 아주 오랜 만이다. 퇴고할 생각도 고쳐 쓸 생각도 없다. 지금은 그저 흘러 나오는 대로 기록하고 싶다.
그녀에게 주었던 편지들은 모두 버리고 지웠다. 헤어진 이 후 그녀에게 연락이 왔을 때, 그녀에게 그동안 못했다고 생각했던 말들을 쏟아 냈다. 그녀는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썼다. 그제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말을 했는지 지쳤다. 나의 말은 공허했다. 그녀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후회를 남기 않아야 된다는 마음에서 말을 쏟아 냈지만 그건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을 걸 알기에 더 공허했다. 다 지우고, 이제 이 글 하나만 남는다. 나를 아는 이가 오지 않는 곳이기에 적어 둔다. 이 글을 지울 때가 오면 아마 그녀의 흔적을 견딜 수 있을 때가 된 것이리라.
나는 글을 쓴다. 고독할 때도, 뭔가 견딜 수 없을 때 글을 쓴다. 행복에 차 있을 때는 글을 쓰지 않는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만 나는 집중할 수 있다. 집중이라기 보다 어떤 무의 상태에 이른다. 모니터와 노트에 완성되는 글을 관조하듯 바라 본다. 글이 어디선가 솟아 나고 날아와 앉는 기분이다. 나를 채우는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와 감정을 글로 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글을 계속 써야만 하는 건가. 나의 글 따위, 가치 없는 글 따위 쓰지 않겠다 했는데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이런 글 따위 쓰고 싶지 않은데.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쓰고 또 쓴다.
지금은 써야만 한다. 술을 먹더라도 써야만 한다. 문득 죽음의 충동이 커지려 할 때 나는 술을 먹거나 글을 써야 한다. 그게 내가 세상을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나는 나를 버텨야 한다. 나약한 내가 기댈 곳은 없다. 타인은 나를 기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최근 성격검사를 할 일이 있었다. 검사문항이란 건 항상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지만, 너무 뻔해서 솔직하게 답했다. 외향성, 대인관계가 점수가 극단적으로 낮게 나왔다.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항목은 타인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 사교성 항목은, 타인과의 교제를 선호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항목은 점수가 없다. 설문은 당연히 신뢰도 높은 일관성을 나타냈다. 진짜로 답했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사람인 걸까, 의심한다. 이 사회는 관계를 맺지 않은면 살 수 없게 구조되어 있다. 나는 나의 집을, 방을 갖고 싶다. 대인관계만큼이나 낮은 점수를 받은 건 가족과의 관계를 묻는 항목이었다. 나는 부모에게 얹혀 산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 혼자 머물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지만,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 나는 일상에서도 나를 숨기도록 훈련 받고 있다. 나의 사회생활은 괜찮았다.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나는 다시 어려움을 줘 나를 지키기도 한다. 아무도 나를 적으로 삼지 않는다. 나는 본능적으로 처세한다. 가끔은 그게 싫지만, 그런 능력마저 없었으면 나는 견디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열정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준비한다. 더 이상 사랑과 낭만으로 살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모른 채 넘어갈 것이다. 그래야 이 세계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글을 쓰는 나의 모습도 역할극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사랑한다 되뇌이면서, '내가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의심했다. 나는 또 어떤 역할극을 하는 건 아닐까, 사랑과 이별이라는 역할극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나는 나르시스트이면서, 나를 끊임 없이 의심한다. 나의 존재는 불안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불안이었을지도 모른다. 공통점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니면 공통점이 되어선 안 되는 걸 공통점으로 삼기 때문에 사랑에 매번 실패하는 것인가. 내가 관심 갖는 이성은 공통적으로 어떤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결핍이 나를 이끄는 것이란 생각하기도 한다.
시네마 천국은 삶에서 짊어진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언가는 버리고, 어떤 건 간직하고, 버려야 하는 것과 간직해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미 과거의 많은 것을 망각하며 산다. 과거는 언제나 후회를 남긴다. 내가 망각하거나 조작한 기억은 고통을 수반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기억의 편린을 줍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은 잊을 수가 없다. 고통스럽지만, 사랑만큼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 없기도 하다. 사람들이 꿈인지 생신지 확인하기 위해 볼을 꼬집을 때가 있다. 고통은 삶의 감각이다. 지금 내 몸 어딘가를 꼬집으면, 그 자리에 나의 피부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동안에만 내가 살아 있음을, 살아야 겠단 생각을 한다.
몇 년동안 사랑을 피하고 잊고 지낸 시간이, 내 삶에서 가장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단 생각이 든다. 그녀와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무기력했지만 삶의 감각이 조금씩 깨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을 다시 하지 않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사랑을 할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나는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한다. 상처를 주려해도 줄 수 없는 사람이다. 병신처럼 사랑의 낭만을 생각한다. 시네마 천국을 보며 울었지만, 그래도 사랑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사랑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마약과도 같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게 해준다.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내가 이제 더 이상 사랑만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도,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싶다. 이렇게 고통 받는 게 두렵고 견디기 힘들지만, 언젠가 사랑이 없다 여기면, 지금의 인내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과거다.
사랑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다. 나와의 관계에서 오직 사랑만이 존재하는 그런 어설픈 사랑을 하고 싶다. 누군가와 열렬히 사랑에 빠져 또 모든 걸 잊어 버리고만 싶다. 나는 사랑이 또 다시 나를 지배하길 바라고 있다. 마약처럼 잠시나마 나에게 희망을 주길 바라고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들어갈 말이 있다면 그건, 사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