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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3. 


나는 수작을, '가식적으로 꾸미는 일을 낮게 부르는 말'이란 의미로 쓴다. 가식적이라 함은 꿍꿍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기 위해 의식적으로 말과 행동을 에두르거나 거짓을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욕망을 인식하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들 앞에서 보일 연극을 '수작'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당연히 '나'다. 사람들은 삶을 그렇게 수작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각 종 수작들을 배운다. 타인과 어울려야 하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필요한 수작들을 말이다. 질서, (추상적인)법규, 사회적 약속, 예절(禮節), 효(孝), 도덕 같은 문화 혹은 관습이라 부를만한 것들을 몸에 익힌다. 또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십여년 넘게 일률적인 과정과 평가를 통해 몸과 머리에 입히는 시스템을,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촘촘히 만들어 놨다. 생각-사고하는 과정이라기 보다 배움의 과정이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묻지 않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아주 오랫동안 배운다. 개개인은 내부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기 보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정한 바에 따라 개인의 욕망을 왜, 어떻게 통제해야하는가를 배운다. 매뉴얼이라 부를 법한 과정을 통해 온건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란 이들은 매뉴얼에서 어긋나는 사람이 되길 두려워한다. 정해진 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귀따갑게 들어 내재됐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정해진 선을 넘고 싶은 욕망, 본능에 괴로워 한다. 상상해왔던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공포, 지속적으로 주입 받은 그 일탈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행위를 옭아매지만 인위적으로 인식된 욕망들,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된 욕망들은 개인의 내적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어느 지점에서 내가 사회에 적합한 사람인가, 필요한 인물인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고 그로부터 많은 이들이 존재가치에 회의를 찾아 우울함에 빠진다. 나도 그렇지만 우울하기 위해 존재를 나락으로 떨어 뜨리는 것인지, 나락으로 침잠이 정해진 수순인지 인간의 삶에서 필연인 건지 사람들은 가끔 정적인 상태에 빠지고, 영원히 정적인 상태에 머무르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는 시스템에서 끊임 없이 다루는 용어가 희망, 열정, 인내 같은 것들이다. 이와 반대되는 절망, 우울, 게으름과 같은 단어는 부정적인 것으로 배우며 자란다. 윤동주의 서시는 괴로워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우울과 고뇌가 인내를 거쳐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일원적 메시지로 환원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시로 자리 매김한다. 이렇게 보면, 이 시스템이란 게 진보라는 말과 참 어울린다. 실제 그렇기도 하고. 뭐 여담이고, 정체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배우며 사회적으로 설정한 지향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내적이고 정적인 행위, 상태를 꺼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도덕의 역사까지 들이 댈 깜냥은 없지만, 한 사회의 룰은 인간들이 어울려 살기 위해 하지 말아야할, 통제가 필요한 개인의 욕망과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로 죽이지 말자, 훔치지 말자, 때리지 말자 같은 몇 안 되는 원초적인 금지행위에서 지금 시대는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행위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행위들이 규정된 사회에 이르렀다. 인간은 그처럼 간단한 원칙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가 싶지만, 이젠 하지 말아야할 행위와 더불어 해야만 하는 행위들을 규정한 사회에 이르렀다. 해야 한다길래 하고 있는 행위들은 진짜 해야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 다른 말로 자신이 이 사회에 필요한 이임을 인증하고, 그런 증명으로부터 말미암아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해야만 하는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번식을 위한 교미도,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것도, 자고 싶지만 잠을 잘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며 괴롭지만 이러한 삶의 형태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만 내가 살아온 역사가 부정(不正)되지 않으며 이 역사로부터 파생될 미래 역시 부정당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내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정보를 찾고, 공유하고, 가공하고, 인정 받고 이러한 순환을 통해 규격화된 삶의 빈틈을 채워 간다. 나의 삶과 유사한 역사를 지닌 이들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공감함으로써 지향했던 삶의 모습이 괜찮은 선택이었고 지속해도 되겠다는 자존을 갖는다. 이런 자존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집단이 크면 클수록 좋다. 많은 이들이 선택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괜찮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와 유사한 삶을 살고 있고 그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은 집단에 속해 있음으로 정상적인, 온건한 사회구성원이 되었다는 의미다. 삶의 양식뿐만 아니라 가치와 신념 체계를 타인과 유사하게 맞춰가며 사회의 주류-핵심이 되고, 점점 그러한 집단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삶의 형태, 가치체계를 오랜시간 동안 교육 받아 왔다. 개인의 욕망이나 가치, 신념체계를 사회 보편의 것으로 치환시키는 작업을 통해 사회는 예측불가능성을 줄이며 사회의 안정을 유지한다. 사회 안정성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 공포와 혐오를 심어줌으로써 교육시스템의 안정을 꾀하고 동시에 처벌과 낙오의 사례를 끊임없이 만들어 공포와 혐오가 현실이 되도록 만든다. 나 역시 내가 속했던 다양한 집단, 관계들로부터 멀어지는데 큰 고통과 공포를 겪었다.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형성된 나의 자아는 긴 시간동안 내적으로 갈등을 겪게 만들었고 어느 땐가 '섬'까지 떠내려가고 말았다. 학창시절 내내 성실한 모범생이고 착한 아들이었던 나는 욕망을 억누르고, 감정 숨기고, 타인의 시선을 눈치 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맞는 수작 부리는 법을 몸에 체득했다. 마치 몸과 얼굴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나를 바라보며 고통스러웠지만 그 역시 성실하게 억눌렀다. 하지만 썩은 이를 언제까지 참을 순 없다. 썩은 이를 치료하거나 빼버리는 시점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때다. 치과 치료는 무시무시하다, 괜히 치료 받나 생각이 들지만 치료의 흔적이 사라지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조차 일상생활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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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2.

 

내면을 탐구한다는 게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아니라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행위를 표현한, 표현일 뿐이다.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는 것조차 모호하다. 내 안에 진짜 공간이 있는 것인지, 갖고 싶은 것인지,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욕망일 뿐인지, 도망칠 곳이 필요한 것인지, 누군가 있다고 하니 있는 것인지. 존재의 유무를 따지기 위해서라도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나와 같은 경우엔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린 게 섬에 갇히면서다. 갈 곳이 없었고,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안으로 안으로 가라앉았다. 보통의 나였다면 내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보들에 대해-욕망, 본능과 같은 것들-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한 정보를 해석하는 법을 배우지도 않았고, 추상적으로 중요하다, 라고 몇몇 책에서 읽었지만 실제로 중요한지도 몰랐다. 내가 살아오는 시간에 걸쳐 훈련한 것은 어딘가 밖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해석하는 행위들 뿐이었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내가 행위의 주체는 아니지만 사회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해석을 하고 몇 마디 덧 붙이며 나를 둘러싼 세계의 그림을 그린다. 나라는 존재는 그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었고 존재 자체가 목적이었다. 어쩌면 맹목적 생존기계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라 앉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속수무책이었다.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놔둬볼까 싶었지만, 그 끝이라는 게 뻔함을 깨닫고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가라 앉던 몸뚱이를 끌어 올려야만 했다. 가라앉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가라 앉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아무도 애기해주지 않았다.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던 건 몇몇 책에서 다른 세계가 있다란 암시, 묘사 등에서 내가 가라 앉고 있는 세계가 어디인지 지례 짐작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두렵지만 멈출 수 없었다, 침잠은 나의 선택으로 발생한 결과와 타인이 선택한 결과들이 얽히고 설켜 도무지 풀 수가 없었고,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돌이켜 보면, 물 한 가운데서 온 몸에 힘을 잔뜩 주고 가라 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 꼴이었다. 힘이 빠져 가라 앉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내가 배운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어딘가를 향해 손발을 저어 닿아야 했고 닿아야 하는 곳은 항상 존재해야 했다. 항상 물 위에 떠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요 받았고 물 위에 떠 있는 법을 배워왔지만, 가라 앉는 법과 떠오르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침잠하다 다다른 곳이 어딘지 모를 섬이었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고독이나 외로움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 표현할 수 있을 듯한 세계였다. 그 섬이라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곳으로 나마 휩쓸려 갈 기력마저 없었다면 더 깊은 곳으로 가라 앉아 버렸을 것이다. 그곳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텍스트는 나 뿐임을 깨닫는다. 아무런 목적이 필요없는 그 시간에 무기력을 체감하며 내가 그동안 만들어 왔던 세계에 대해 무감각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갔지만, -돌아보면-정작 나에 대한 감각은 살아나고 있었다. 그건 낯선(uncanny) 경험이었다. 늘상 사용하는 외롭다, 혼자다, 고독하다, 하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같은 표현들이 생생하게 다가 왔다. 낯선 공간, 경험은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 나를 엄습하는 낯선 공포는 세계와 격리된 나를 더욱 숨게 만들었다(그게 나의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상실하고 익숙하게 생각했던 고독이 불쑥 세계를 재구성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 떨어진 나는 무엇을 할해야 하는지 몰랐고 낯선 것에 노출된 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익숙한 것(canny)과 낯선 것(uncanny)이 혼란스럽고 서로 자리를 바꿔갔다, 내가 섬에 머물렀던 건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공포감을 느끼고 도망친 결과이기도 했다.

 

내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진실로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었던 것인지, '진짜 세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지금도 진짜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을 부수고 싶은 욕망에 갖고 있던 것을 상실하고 회피한 것인지,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혼란과 공포에서 도망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두 가지의 욕망과 충격이 모두 기제(機制)로 작용하긴 했을테지만 무엇이 더 강한 자극이었는지 모호하다(이런 기제가 작동하게 된 핵심 사건을 여기서 다루진 않겠다). 영화 트루먼 쇼의 짐 캐리처럼 일상의 균열을 감지하면 멈출 수 없는 호기심과 균열 뒤에 있을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행동을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기도 한 것 같다. 내 경험의 특수성과 내가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고 공포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자연스러운 경험이기도 했다. 존재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거치게 된 과정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내가 좋아 하는 표현인-'가장 보통의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라는 존재와 '위치'를 자각하는 시간이었지 내가 어떤 우월하고 '독특한 지위'를 가진 인간이 되는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 상실한 세계에서 내가 특별하고 지위를 가진 인간임을 원했다면. 가라앉고, 섬을 발견-생성하고, 다시 섬을 나오는 과정을 통해 내가 그저 평범한 인간임을 느끼고, 단지 '인간'이라는 '보편자' 중 하나의 '개별자'로서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일련의 시간적 흐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흐른다. 흐름에 깊이 잠기는 것과 얕게 잠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 벗어날 수 없는 흐름에 몸을 담게 됐다. 과거처럼 무기력과 고독,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 않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익숙하고도 낯설다. 이러한 요소는 나라는 존재의 충분조건이지만 전체가 될 순 없다. 그래서 택한 것이 내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이름을 선택해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 만들어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기에 그 절대성을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이 가진 절대성은 가히 아틀라스가 떠받치는 하늘과도 같기에 내가 감당할 수 없다.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지만, 내적 심연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고 깊이 가라앉을 수 없었다. 내면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타자가 필요했다. 필요한 건 타인과의 관계였고, 타자들이 만든 세계에 내가 속해 있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을 취했다. 죽음이 내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수작(酬酌)이라 불러도 할말 없다. 난 진짜 수작이 필요했고 그러한 수작이 내가 익숙한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 요소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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