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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말이 많았던 슬기오운 감빵생활을 몰아봤다. 유쾌하게 봤다, 드라마를 별로 안 봐서 그런지 이전 드라마들과는 조금 다른 포인트가 있었던 것 같다.


전반적인 감상은 드마라판 진짜 사나이를 본 것 같다. 어찌 감옥이 즐거울 수 있으랴. 군대를 갔다온 입장에서 진짜 사나이를 봤을 때-이리저리 오다가다 짧은 클립을- 참으로 낭만적이다, 군대 캠프 같네란 느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나 오래된 사람이 보기엔 지낼만 한가보다 싶겠다 생각할 만한 그림이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도 비슷한 감상이다. 이런 생활이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거 아닐까란 생각이 들만큼. 


그런 감상이 든 건 슬빵이 코미디라서다. 예능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볍게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비극적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운명, 감옥이라는 환경의 부정적 인상을 상쇄시키기 위해 화면을 밝게 잡았고, 내용도 밝게 꾸몄다. 이따금 비추는 어두운 그림자는 현실적 감각을 깨웠지만, 어두운 그림자는 코믹스러운 극적 연출로 무마시켰다. 


슬빵은 자료 조사를 참 성실히 했다고 느꼈는 데, 그 자료라는 것들의 성질이 밝은 것일 수가 없다. 무거운 걸 가볍게 덧칠하다 보니 곳곳에서 빈틈이 나타났지만, 사건에 사건이 이어지는 꽉 짜인 연출에 보면서 딴 생각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극 후반에는 선악이 분명하게 나뉘었지만 초반에는 긴장하면서 드라마를 볼 수밖에 없던 게 등장인물이 선역인지, 악역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성동일이 맡은 조주임의 돌변을 보면서 법자도 어떤 지점에서 변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했다. 교도소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신회할 수가 없단 걸, 사람은 믿을 수 없단 걸 확인해준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인생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양면성이 두드러졌다. 깜빵에 들어온 놈 중 착한 놈 없고, 핑계없는 무덤 없다지만 2상6방 사람들에게는 '핑계'를 만들어준다. 감옥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방사람들은 좋은 인간으로 만들었다가 나쁜 인간으로 만든다. 누군가는 좋은 결말로, 누군가는 나쁜 결말로 인생이 이끌리고 모두 삶에 후회를 남기며 감옥 생활을 해나간다. 어느 땐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 데 못 믿을 놈이었다, 미운 인간인데 정을 안 줄 없다. 관계의 오고 감이 극 진행에서 두드러졌다. 


교도소는 항상 들고 남이 있다. 드라마의 연출이겠지만 좋든싫든 헤어졌던 사람과 다시 관계를 맺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관계가 덜컥 끝나 버리기도 한다. 문래동과 고박사의 퇴장은 신선하다 못해 놀랬다. 보통의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역학을 한 순간 없애 버리기가 쉽지 않다. 교도소의 생활이 그러했을 테지, 2상6방 사람들은 이감과 출소로 한 순간 화면에서 사라진다. 만남과 이별의 반복, 삶의 양면성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한국 드라마의 주된 흐름은 사건이 상황을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배우의 대사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다. 특히, '리얼타임'이 되가는 드라마 후반부에는 얼굴 컷 주고 받으며 대사만 쳐댄다. 촬영 편하고 쪽대본 쓰기 편하니까. 공중파 드라마 제작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케이블 드라마는 사전제작 부분을 크게 늘려 연출의 공백을 최소화한다. 슬빵은 대사로 처리할 부분이 많지 않았다,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사건과 사건이 캐릭터를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은 대사가 아니라 사건이 이끌어가야 한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끊임없이 사건을 배열하고 아이디어를 짜넣은 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료 조사가 철저했기 때문일 것이다. 재료가 많으니 미적지근한 대사와 느릿한 연출로 시간 끌 틈이 없다. 어쩌면 써야 할 자료가 많이 남았을지도 모른다란 생각이 들만큼 밀도 있는 각본과 그에 맞는 연출이었다. 떡밥을 많이 뿌리고 이를 다 회수할 만큼 연출에서 버리는 장면이 없고, 사전에 잘 준비된 각본이었다.






제혁을 둘러싼 큰 사건이 극을 이끌어가지만, 교도소 내의 사소한 사건들이 더 재밌었다. 교도소에서는 이렇게저렇게 생활하는구나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던 부분들이 매력적이었다. 특징이 두드러지는 캐릭터들의 배치도 아마 사전 조사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쳐 만들어진 캐릭터일 테지. 무한도전에서 가장 재밌는 게 미션 해결이 아니라 그냥 둘러 앉아 토크하는 거랑 비슷하겠다.


헤롱이가 출소 후 바로 잡혀 들어가는 연출을 하는 데, 이는 어느 정도 상상의 장면이라고 봐야 겠다. 헤롱이는 출소 후 어느 순간 과거에 발목 잡힌다, 약을 다시 한다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헤롱이가 다시 잡혀 들어가는 걸 보고 이게 끝이야 싶어 뒤로 넘기고 찾아 봤는데 그게 마지막이더라. 슬빵의 이별 장면들은 매정하기도 하다. 


부분부분 엉성한 점도 눈에 들어왔지만, 전반적으로 유쾌하게 봤다. 팽부장 츤데레에 잠시 푹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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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2.



이 책을 읽으며 혼란스러웠던 건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이론이기 때문이었다. 헤겔부터 시작된 인정투쟁의 아이디어를 현대로 끌고와 논하고 있지만 저자가 말한대로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투쟁이란 아이디어는 범용성이 크다 생각했다. 역사나 문명의 연대기를 서술하기엔 적절하지 않아 보이지만 현대사회로 다가올수록 인정투쟁이란 이름을 붙일 만한 사건이 다양해진다. 책에서 말하는 디테일은 현실에 적용했을 때 수정-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느꼈지만 인정투쟁 개념 자체는 유용한 도구임에는 분명하다.


인정투쟁의 구도는 상당히 단순한데,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책모임의 한 명은 번역이 거지 같아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했다고 한다. 번역 때문에 항의전화를 한 건 이번이 두 번째라고. 악셀 호네트 밑에서 공부했다는 두 명의 유학파는 스승의 대표작을 국내에 소개하는데 보람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어 실력이 그 모양인 건지 원서를 번역하기가 정말 힘들어 책을 그 모양 쓴 건지 알 수는 없다. 꼼꼼하게 헤겔과 미드를 전반적으로 분석했으나 '무시' 파트를 빼면 특별이 더해진 게 없어 빈틈이 많은 이론이었고, 번역도 엉망이라 읽는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추천할만한 책은 또 아니었다. 범용성이 높아 어떤 사건에 적용할 수 있을지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책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이 제시되지 않아 오히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듯도 하여 인정투쟁이란 용어사용을 자제하는 편이 좋겠다란 생각도 했다. <인정투쟁> 외에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대담집을 읽어보면 인정투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예상된다.


읽으며 스스로 흥미로웠던 점은 인정투쟁의 실패나 부정적인 면이다.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의 밝은 면, 공동체 발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연하지만 인정투쟁이 긍정적인 합목적성을 갖지 않을 수 있고, 당사자의 사익 추구의 발현이 인정투쟁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인정투쟁의 '그림자'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개인이 인정투쟁에 지속적으로 실패할 경우 자살에 다다른다. 단순히 죽음에 이른다고 표현하면 자살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살지 않는다. 결국 인정투쟁은 타인과 관계맺기인데, 모든 관계맺기에 실패해 고립되면 <인정투쟁>에서 말하듯 개인의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없어 자살하는 것이다. 고립되기 전 고립될 것이라는 공포감이 자살로 인도할 수 있다. 이 경우 타자들이 관계를 맺고 싶어하리라 예상된 '나'의 조건을 채울 수 없다는 판단이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미드가 말하는 '목적격 나'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의 사회문화, 교육시스템, 미디어 등은 정상적인, 성공적인 '나'의 모델을 공고하게 만들고 빠르게 확산시킨다. 종교의 교리처럼 개인은 사회적으로 제시된 '나'를 모방하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고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모델은 강력한 사회적 규범으로 작용하고, 인정투쟁의 목적이 된다. 개인의 정체성은 비교나 경쟁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명확한 목표 지점이 정해지면 비교와 경쟁이 시작된다. 그 길 밖은 낭떠러지다. 밀려날 걸 예상해 스스로 떨어지는 건 자살 본래 의미와 맞닿아 있겠고, 다른 사람에게 밀려 떨어지는 건 요즘 자주 접하게 되는 '사회적 타살'이란 용어와 맞닿아 있다. 레이스 주최 측은 '모든 낙오는 스스로 떨어진 것'이라는 룰을 만들어놨기에 '낙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인 예는 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학교폭력이 주목을 잠깐 받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곪아 있었다. 학교는 내부를 지키는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라 내부를 가두는 울타리다. 그 안은 세계는 자연상태의 정글과도 같다. 힘 있는 자가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더 큰 인정을 받는 것이다. 돈, 폭력, 부모의 후광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힘의 조건들이 학교 울타리 안에 적용된다. '어른들의 세계'에 적용되는 생태켸 법칙과 다를 바가 없다. 강할수록 살기 쉽고, 약할수록 잡아먹히기 쉽다. 돈, 폭력, 부모의 후광 등이 유용한 인정투쟁의 도구임을 깨닫고, 사용 후 실제로 큰 인정을 획득하게 된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학교 폭력에 가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적 또한 인정투쟁의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학교 생태계에서도 마찬가지, 지속적인 인정투쟁의 실패는 자살로 귀결된다. 




00.


책 뒤 새로 써넣은 부분에서 악셀 호네트는 미드와 결별했다고 선언한다. 내가 이 책을 왜 읽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드 자리에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 등 정신분석학을 집어넣어 공동체가 아닌 개인에 더 집중하는 건 어떨까도 생각해봤으나 '제3의길'을 추구하는 저자의 생각과 동떨어지게 될 것이라 아이디어로만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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