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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소장과 이준석이 하차한 썰전에 전원책과 유시민이 합류했다. 둘이 처음 방송을 녹화한 모습은 사람들의 기대를 그대로 충족시켜줬다.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배짱과 검침없는 입담으로 오랜 만에 썰전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철희 소장은 썰전에서 격분한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때 정부의 대응에 답답할 때면 흥분한 모습을 보였지만 나름 신사적인 모습을 갖추려고 했다. 초기 강용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철희 소장보다 더 젠틀한 모습을 갖추려 했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이철희 소장은 아무래도 야당 인사들과의 관계 때문에, 강용석은 자신의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언사를 삼갔다. 특히 강용석은 가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칭 '보수' 포지셔닝을 하며 정부와 여당을 감싸는 모습을 보여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이준석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보수라고 정체성을 밝힌 전원책 변호사는 사람들에게 벌써 '모두까기'란 소릴 듣고 있다. 방송 중간 왜 안철수의 국민의당만 까냐고, 더민주당도 까고, 새누리도 까야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원책이 정치권과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현역 고위공직자, 국회의원들 모두 정치적 단두대로 보낼 수 있다며 그들의 도덕성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전원책의 모습을 보며 제대로 된 보수가 등장했다며 반겨했다. 그동안 보수, 진보가 문제가 아니라 비상식적인 내 식구 감싸기와 알맹이와 원칙없는 언사가 대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유시민도 가끔 격하게 말하기로 따지면 둘 째 안 갈 사람인데, 전원책의 정신 없는 수다와 분위기를 보느라 얌전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전원책은 강한 어조를 여유있게 받아내고 때때로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등 인기있는 논객으로서의 내공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원래 안티가 많던 썰전 방송 후 유시민조차 전원책과 함께 괜찮은 보수 진보 인사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원책도 그렇고 유시민도 그렇고 아직 완벽하게 썰전에 익숙해진 건 아니지만 둘은 자신의 캐릭터를 첫 등장부터 유감없이 보여줬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굽힘없는 모습을 보이는 김구라도 적응 못해 쩔쩔 맸는데 앞으로 전원책이 조금 말을 정리해 심플하게 하면 훨씬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시사프로그램이 아니라 예능시사 토크라는 점에 준해서 보면, 시청자들도 너무 무겁지 않게 어프로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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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었을 대나는 초등학교 몇 학녀이었을 거다. 당시엔 시디가 없었고 테이프로 노래를 듣던 시절인데 형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테이프를 사모아 듣곤 했다. 어느 날 나에게 했던 자랑이 아직도 기억난다. 길거리를 가는데 나오는 노래가 모두 우리 집에 있는 테이프라 뿌듯했다는 거다.


굳이 나도 함께 사던 중인데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건 그때부터 내 음악 취향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뭐 어디서 정보를 얻을 곳도 없고, 노래를 다운 받을 수 있는 곳도 없고, 라디오도 안 듣고. TV에 나오거나 어쩌다 스쳐지나며 들었던 라디오의 한 두곡을 들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가요톱텐'에 나오는 그런 가수들 말고 약간 비주류, 1.5군 정도의 사구들 테이프를 한 두 장씩 사기 시작했었던 때였다. 형은 자신이 생각하는 컬렉션이 만들어지지 않아 서운했던 거 였다. 









당시 김광석이 죽었다고 해서 떠들썩했다. 뉴스에 나오고 그랬다. 그런데 우리집에는 김광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형도 몰랐도, 형과 나를 키웠던 할머니도 그가 누군지 몰랐다. 맞벌이를 하는 아버지 어머니와는 음악이 어쩌고 이런 얘기를 해본 기억이 없다. 사실, 별 다른 대화를 했던 기억이 없다. 그의 노래를 듣게 된 건 고등학교 쯤부터였다. 이등병의 편지나 알고 있었는데, 그건 그의 노래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다. 서른즈음에를 들었고, 사랑했지만도 조금 들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도 조금 들었고,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도 조금 들었다. 


당시만해도 이젠 테이프에서 시디로 대세가 넘어왔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야자 때문에 집에서 주던 약간의 돈과 용돈을 모아 시디를 사곤 했었다. 그래서 김광석 다시부르기 1을 샀다. 정말 좋았다. 그의 정규앨범인지 리메이크 앨범인지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다시부르기2도 샀었다. 그런데 다시부르기1이 너무 귀에 익어서 다시부르기2는 자주 듣진 않았다. 









당시 그런 구닥다리 노래를 듣는 사람은 없었다. 사랑했지만 정도가 듣기 쉬운 멜로디고 고음부가 있어서 내 또래 아이들이 아는 정도였다. 언젠가 김경호가 그 노래를 리메이크해 부르고 큰 히트를 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튼, 고3 시절 당시 엄청난 거금을 써 김광석 시디 3장, DVD 1장, 그의 일기장이 묶인 패키지를 구입했다. 당시 4만원 대 정도 였던 거 같다. 목동 사는 애들에게는 그리 큰 돈이 아닐지 모르지만 내 한 달 용돈 줄 꽤 큰 부분을 썼던 기억이다. 몇 년 동안 내 보물 같은 거 였다. 


그 시디도 왠지 1번을 많이 들었었다. 1번 시디를 다른 학교 친구에게 빌려준 일이 있었는데, 얼마후 돌려 받으며 자살할 것 같아서 못 듣겠다는 이야길 들었다. 독서실에서 그 시디를 돌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던 것 같다. 그렇지? 나는 반색했던 것 같다. 김광석의 노래는 그런 맛이 있었다. 









지금은 고등학교 때나 대학 때처럼 깊이 빠져서 듣진 않지만, 김광석은 과거보다 훨씬 가까이 와있다. 그의 더 많은 노래를 알게 되었고, 노래에 담긴 감정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됐다. 나름 나 혼자 만족할만큼 맛을 살려 그의 노래가 불려질 때도 있다. 기타도 한 곡 정도는 칠 수 있다. 왠지 그가 과거보다 더 가까워졌단 사실이 반갑게 느껴진다. 


언젠가는 이런 노래를 부르던 사람은 살 수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죽은지 20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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