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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월드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쳐'라니.



누군가 이 영화가 '재밌다'고 했는데, 그 재미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그런 재미는 아니었다. 엔딩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엔딩 부분을 제외하고 영화는 잘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디즈니라는 단어만 보고 영화를 지레짐작하는 사람이 많을 테다. 꿈, 희망, 행복 이런 단어들이 떠오르니 당연히 '아, 어린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거 겠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아이들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없진 않겠다. 그 행복이 '디즈니'라는 상징이 만든 정형화된 행복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도 흔히 TV에서 볼 수 있는 가족의 행복, 그로 인한 인생의 성공 스토리를 접할 수 있다. 그게 현실과 다르다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듯,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가 만든 상징이 현실과 다름을 이야기한다. 


네이버 영화평에 써놓은 멍청한 소개글은 아마도 영화를 팔아야만 했던 배급사의 짓이었을까. 어쩜 이렇게 영화 소개글이 복붙한 것처럼 똑같은 건지. 해외에서 극판 호평, 진정한 행복 전달, 눈물 감동 웃음 재미 선사, 올해 최고의 영화, 놀라움 사랑스러움 경이로움 특별함. 똑같은 원고에 사실관계만 바꿔서 올리는 거 아닐까 싶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말그대로 사실관계 밖에 없다. '무니'역을 맡은 아이가 사랑스럽고, 영화가 활기차고 행복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어도 엔딩 이후 가슴에 남는 우울함이 영화를 보고 느낄 감상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정신 나간 인간들.



우리 나라와 환경이 달라 느낌이 많이 달랐지만, 표현하자면 모텔에서 지내는 두 모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범죄 경력을 가졌을,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진 미혼모는 힘들게 살아간다. 이 영화가 좋은 건 신파가 없다. 울고 짜고 불행을 강조하고 고생 끝에 행복을 거머쥐는 연출이 없다는 것. 생활이 쉽지 않지만 아이와 엄마는 내색하지 않으며 하루를 살아간다. 


관객은 딸 무니의 시선을 통해 플로리다의 현실을 마주한다. 그녀는 자신이 지내는 매직 캐슬 주변을 낱낱이 알고 있다. 친한 친구를 사귀고, 함께 놀거리가 가득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를 당당히 밝히며 신나게 산다. 무니가 너무 예쁘고 활기차기 때문에 관객은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현실을 잊고 만다. 


무니의 밝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순진무구함의 결정체다, 다른 하나는 엄마와 마찬가지로,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현실 알고 감내하며 삶에 충실하다는 관점이었다. 당연히 우울한 후자가 내 의견이었다. 연출에 있어 그런 의도가 있지 않았겠느냐라고 주장은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나이에 맞는 순진한 아이였던 거 같다. 보는 내가 너무 닳아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지. 아이에겐 매직 캐슬이나 디즈니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녀가 있는 곳이 무궁무진한 '디즈니'였으니까. 감독은 아이의 눈을 통해 좋고나쁨, 선악 구분짓기를 내려놓지만 어른의 시선은 그렇지 못하다. 관객인 나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의 어른들도 마찬가지. 무니는 순수할지라도 그녀를 둘러싼 현실은 순수하지 않다. 



영화에는 두 번 정도 침묵 속에 앉아 있는 엄마 핼리의 뒷모습이 나온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컷.


영화의 시선에 개입하는 제 3자인 어른이 있다. 영화에서 1인칭 관찰자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매직 캐슬 매니저 바비다. 무니 엄마의 시선은 무니와 시공간이 거의 같아 크게 다르지 않다(화재 때문에 애슐리와 싸운 것 빼곤). 바비의 시선은 감독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감독 션 베이커가 본 플로리다의 현실은 바비를 통해 전달된다. 우리 나라 말로 하면 이상한 어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Sympathy와 Empathy로 비유할 수 있겠다. Sympathy보다 적극적인 이해와 공감의 의미인 Empathy는 션 베이커가 바비를 통해 드러냈다. 션 베이커는 플로리다의 현실, 아니 미국의 잘못된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Empathy를 이번 영화로 표현했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Sympathy를 느낄 것이다. Empathy보다 한 걸음 떨어져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미국 영화이기에 아무래도 한국 관객이 Empathy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엔 사실 거리감이 좀 느껴진다. 


영화의 엔딩을 보고 대부분의 관객들이 벙쪘을 거다. 의미는 이해가 가지만, 영상이 갑자기 튀어서 당황스러웠다. 툭툭 상황을 던지고, 리얼리티를 살리던 영화에서 급작스레 등장한 엔딩씬은, 스포일러 문제로 자세한 언급을 하기 어렵지만, 일관된 표현 방식이 아니었다. 내가 뭐라고 감독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지만, 표현이 좀 이상한 엔딩이긴 했다. 



00.

모녀와 바비의 상황을 바라보며 즐겁다, 재밌다, 행복하다고 느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뭐, 내 상식에서, 일반적인 감정선을 가지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소개하려 한다면 당연히 표현을 걸러서 다뤄야 한다. 모녀가 놓인 현실에서 묵직한 우울함을 느꼈지만, 어린 무니에게 대물림될 현실의 무게가 마음을 더 크게 짓눌렀다. 행복, 희망, 즐거움 따위의 표현을 사용해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다루는 글은 쓰레기 취급을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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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2



 나갔다가 들어왔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이놈의 여편네가 장난치나. 그녀가 왜 나가는 줄 모르겠지만, 왜 들어오는지 모르게 돌아온다. 굳이 따지고 들어도 그녀의 대답이 궁색할 것이고, 그도 무어라 물을지 궁색할 것이다. 무심코 따지고 들었다가 괜히 보기 싫은, 칙칙하고 어두운 냄새가 나는 일이 꾸물꾸물 기어나올 것 같다. 비록 축축한 이불이지만 그 안에서 발명도 하고 논문도 쓰고 게다가 시까지 지은 그인데, 마누라가 가출하는 이유를 모를리 없다. 아마 이야기를 꺼내기가 귀찮았을 것이다. 게으른 게 세상에서 제일로 가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 내가 대신, 이야기해야겠다.


혼자 멍하니 앉아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니, 지난 반 년 동안 오직 사랑을 위하여-맹목적인 사랑을- 그 밖의 인생의 의의를 모두 소홀히 했음을 깨달았다. 첫째는 생활이다. 사람은 반드시 생활을 해야만 반드시 사랑도 비로소 따르게 되는 것이다. (루쉰 / 죽음을 슬퍼하며)


 그녀가 떠난 이유는, 나라도 그를 떠났을 것이다. 돼지처럼 때가되면 차려주는 밥먹고 드러누워 자고, 돈 버는 일이란 전혀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왜 결혼했는지도 모르게 한 결혼, 사랑이란 단어가 이렇게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풍경을 자아내기도 어렵겠다. 그녀는 지쳐갔을 것이다.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고, 남편이 옆에 있어주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고 모든 사실이 덮어지지는 않는다. 

 그와 아내가 사는 공간의 관계는 모두 ‘돈’으로 맺어져 있다. 그와 오의 깨끗했던 관계가 파탄난지는 오래다. 오의 아버지가 백만의 가산을 날리고 오가 화필을 던져버리며 눈물을 흘리던 그날, 이미 관계는 변했을지도 모른다. 봄은 몇 번이고 돌아왔지만 오에게 맡겨놓은 ‘100원’은 돌아올 생각을 안했다. 그는 언제도록 사직공원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던 오를 그리워할 것이다. ‘100원’을 가져간 오는 그의 안중에 없다. ‘그 시절’의 오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마련한 ‘100원’의 출처는 그녀가 일하는 R회관의 뚱뚱한 주인이다. 그는 아내를 앞세워 빚을 낸다. 빚을 내던 그날 유카타를 입은 뚱뚱보 주인에게서 느낀 모욕은, A취인점에 마주쳐 무심코 고개를 숙인 그때 살아난다. 뚱뚱보에 대한 화가 아니다. 칙칙한 근성에 대한 분노다. 스스로 복종해버리고 마는 근성, 비굴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다. 

 아내는 돈을 벌기위해 밤마다 사람들을 만난다. 몸이 야위어가든, 더러운 돈이든 개념치 않다. 돈을 벌고 쓰면 된다. 계단에서 몸을 굴려 번 돈 20원 따위는 ‘쓰기’ 위한 돈이다. 지금은 돈을 유통 시킬 능력이 있을 때만,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받는 사회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를 증명하고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한 ‘절차’다. 존재의 기반이자 관계의 기반이기도 하다. 마유미가 오에게 주는 3, 4, 5원도, 오가 여자들에게 주는 패물도 ‘100원’과 ‘20원’처럼 자의든 타의든 타인들과 관계를 맺게 한다. 돈이 없으면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경제능력이 전무한 그는 아내가 떠나가더라도, 붙잡을 수 없다.

 

 하여간싸움을해가면서벌어다가그날저녁으로저끄나풀한테빼앗기고나면........아니송두리째갖다바치고나면속이시원합니다. 구수합니다. 그러니까저를빨아먹는거미를제손으로기르는셈이지요. 그렇지만또이허전한것을저끄나풀이다소곳이채워주거니하면아까운생각은커녕저희가되려거민가싶습니다.


 오는 마유미를 속여서 돈을 받아낸다고 생각하나, 마유미는 오에게 돈을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가 그 사실을 안다해도 무엇이 변할까, 서로에게 얻고 싶은 것을 얻으면 된다. 마유미를 빨아먹는 오는 거미다. 아내를 빨아먹는 그도 거미다. 아내의 양말 사이 정강이에 붙어 정기를 속속 빨아내는 그 돈, 돈도 거미다. 세상 생사람까지 잡는 그 놈의 돈도 거미다. 그의 ‘귤궤짝만한 방’에서도 거미냄새가 난다. 그 방도 거미인게다. 그런데 마유미는 오에게서 무엇을 빨아 먹고 있기는 한 것일까. 

 오의 입장에서 오는 실체가 있는 물질을 빼앗고 있다. 빼앗으면 빼앗을수록 부는 차곡차곡 쌓인다. 자신에게는 플러스가, 마유미에게는 분명 마이너스다. 오는 돈 쌓기를 반복한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정신적인 만족을 얻는 마유미가 손해보고 있다. 마유미뿐 아니라 오가 들러붙어 돈을 빨아 먹는 이들 모두 손해보고 있다. 우리는 ‘돈’으로 치환될 수 있는 물질을 잃게 되었을 때, 그렇게나 찜찜한 기분을 맛본다. 하물며 스스로 돈을 내주다니. 돈 없는 스트레스와 비참함은 아나 돈이 많아 생기는 스트레스는 겪어 본 일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에 마유미의 행동은 공감이가지 않는다. 돈은 쌓이면 쌓일수록 사람을 욕망의 노예로 만든다는 말 또한, 공감하지 못하겠다. 세상엔 돈이 많아 슬픈 일보다, 돈이 없어 슬픈 일이 더욱 많다. 수많은 슬픔 중 마유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슬픔은 정신적 공허마저, 돈이 아니면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마유미는 사랑을 돈으로 샀다.  


 “하지만 ....... 왜 죽었는지 모르십니까?”

 “누가 아나? 여하튼 죽었다더군.”

 나는 이미 어떻게 그에게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쯔쮠은 이제 다시는 작년처럼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비록 위엄과 냉대 속을 공허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이른바 인생의 길을 걸으려 해도 이미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내가 준 진실로 결정지워졌던 것이다. -사랑 없는 인간은 죽고 만다는 진실. (루쉰 / 앞의 책)


 오라고 단순히 돈이 목적이었겠는가. 그래서 아내는 돌아왔다. 그녀도 끄나풀이 필요하다. 끄나풀이 필요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현대인이 고독해져만 가는 이유는 사람들의 관계가 조금 조금씩 돈으로 바뀌어가는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안다하여도 돈의 힘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를 위하여 간 경찰서인지 모르는 그곳에서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나올 수밖에 없다. 계단에서 구른 건 그의 아내였으나, 머리를 조아려야 한건 그였다. A취인점에서 고개를 숙였을 때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러나 그 눈물에 대답해줄이는 아무도 없다. 해줄리 만무하다. 애당초 기대하지 말아야한다. 다시 그 ‘귤궤짝만한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공간이란 나쓰메 소세키가 『문』과 『마음』보여줬듯, 한없이 나약하다. 한 인간이 기댈 곳이란 결국 자신이 음습하고 어두운 가슴 한 구석이다. 고독하더라도, 그 길뿐이다.


 수업이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7층, 11층, 15층에 서는 전망용 엘리베이터는 올 여름에 생긴 것이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인지라 사람들이 많았다. 7층을 거쳐 11층, 15층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두 번쯤 엘리베이터를 놓치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올라갈 필요는 없지만, 위층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했다. 서있는 것도 무료하거니와, 7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계속 서있자니 내 뒤에 서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은 나를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랬다. 어쩐지 내가 이렇게 서있는 게 궁상맞아 보였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한 번만 더 기다리면 탈 것 같았으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처음 엘리베이터가 들어왔을 때 신기해하며 15층까지 올라갔던 이 후로 15층까지 올라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북악관은 꽤 높다. 조형관 옥상에 화분인 뭔지 모르나 초록색 물건으로 만들어진 'G' 너머로 성북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빨간 벽돌을 바닥에 흩뿌려 놓은 듯이 집들이 차곡차곡 쌓여져있다. 네모반듯한 집들은 빈틈없이 빼곡하다. 심시티를 하다 귀찮은 생각이 들어 아무렇게나 마우스를 휘둘러 주택가를 만든 것처럼 질서정연하지 않다. 그저 빈틈없이 쌓여 있다. 거리가 멀어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렇게 많은 집과 아파트에 사람들이 모두 살고 있을 텐데. ‘거미는 밟아 죽여야 한다’고 그랬다. 빨간 벽돌 위로 기어다니는 거미가 무심코 쌓인 다른 벽돌 사이에 끼어 콱 찌그러져 죽듯, 사람들은 집과 집 사이에 끼어 콱 찍혀 죽은 게 아닐까. 전망용 엘리베이터의 유리를 만진다. 유리 너머의 세상은 미니어처 같이 비현실적이다. 박람회에서 주택가 모형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유리 밖에서 보는 나도 미니어처처럼 보일까. 문득 미쓰비시 옥상에 서있는 이상의 눈앞으로 펼쳐진 광경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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