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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30.




시놉시스만 보고 뭔가 뻔할 것 같은 이야기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당연히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잘 안 떼어졌다. 영화를 보고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든 생각은, 이야기가 큰 틀에서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파멸로 이르는 디테일은 예측할 수 없었으나 전작 돼지의 왕처럼 짜증날정도로 현실적이고 결국 모든 게 끝장날 거라는 그 느낌만은 살아 있었다.


찜찜함,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좆같음. 이 영화를 본 후 누구나 이 말을 뱉고 싶어 목이 간질간질 할거다. 같이 봤던 이는 치밀어오르는 찜찜함을 누르기 위해 소주를 마셔야 한다고, 한 번 들어가기 시작한 술이 멈추질 않았다. 우린 영화를 보며 착한 놈과 나쁜 놈을 나누는데 익숙하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난 후 밀려 오는 찜찜함은 착한 놈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게 너무 현실인거라.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취하는 건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희노애락을 맛 보기 위해서이지, 매일 같이 시달리는 현실의 좆같음이 다시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애니매이션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묘사하려고 한다. 묘사가 너무 실감나서, 사람들은 눈을 뗄 수가 없다. 


현실을 이루는 건, 시공간이고 뭐고를 떠나, 사람들이 매일을 살며 만드는 삶의 관계와 연속이다. 이 작품을 보고 딱 그말이 떠올랐다. 이야기를 짤 때 캐릭터를 잘 만들고 굵직한 공간과 사건 설정 해놓으면 캐릭터가 그 안에서 알아서 살아 움직인다는 말이다. 이 작품의 힘은 주요 3인방의 살아 있는 움직임이었다. 수몰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을 부여했을 때 그들이 삶을 살아 내는 방식이 애니메이션의 주된 흐름이다. 사회 구조가 좆같다고 느끼는 건 매일 정치 욕과 가족 같은 한국 기업들의 착취 구조 욕하는 것처럼 열은 받을지언정 큰 감정적 동요를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반면 특정 인물로 비난이 좁혀질 경우 우린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다.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리며,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새끼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한층 더 인간적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사이비는 어떤 구조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 물론 각각 캐릭터의 역사를 쫓으면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 묘사하는데 무게를 둔다. 그래서 스크린 안에 현실이라는 지옥도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사이비의 스토리는 극단적이고 눈에 튀는 극적 장치가 몇 가지 있지만, 관객들은 캐릭터에 몰입한다. 난 사기꾼 캐릭터가 가장 좋았는데, 권해효의 더빙이 훌륭했다. 물론 다른 배역을 맡은 이들도 훌륭했다. 내가 사이비 종교 단체를, 사기꾼을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들어 봤을 법한 어투와 내용으로 대사를 줄줄 읊었다. 뭔가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고, 영화처럼 꾸며진 대화도 아니고,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말을 그대로 뱉고 있었다. 언뜻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을 보면 느끼겠지만-굉장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개새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김민철이 딸 등록금을 하루 만에 도박으로 탕진하고 애미자식을 구타할 때 우리는 현실 어딘가에 있을 개새끼에게 감정을 불러 일으켜 몰입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볼 때 뒷 줄에 앉은 여자 관객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영화는 찌듬과 짜증을 줬지만 울음을 일으키는 장면은 없었다. 같이 봤던 이와 나에게는 울만한 장면이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울만한 장면이 있었을 수도 있다. 민철에게 시달리다 자살한 딸에게 자신을 투영했으리라 짐작했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찜찜함은 사회 전체에 대한 울분이 아니라 누군가에는 구체적일 수도, 누군가에는 추상적일지도 모르는 가상 혹은 진짜 인물에게 집중된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 바로 길거리에서 마주쳐 지나가는 모르는 인간들이 만드는 이야기. 그걸 인정했기 때문에 찜찜함을 느낀다.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게 있어'라고 느낀다면 이 작품에 대해 혹평할 수 있다. 미적,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완성도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인간들이 애니메이션 안에서 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의 왕에서도 제목의 돼지는 반 아이들이었다. 사건을 묵묵히 바라 보는, 아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자에 붙었다 약자에 붙었다 하는 인간의 군상이었다. 돼지의 왕을 보고 학창시절을 떠올리지 않는 이 없을테고, 한 번쯤 학교 폭력이나 교육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엄석대의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듯, 돼지의 왕도 학교를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니메이션이 아니다.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본능을 그리고 있을 따름이다. 사이비에서도 진짜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이다. 수몰될 마을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요 3인방을 뛰 놀게 만드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마을 주민 모두는 하느님이 아니라 천국을, 먹고 살 집을, 돈을 원하고 있다. 범죄의 재구성 엔딩에서 박신양이 이런 말을 한다. 사기는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고. 연상호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보고 더러움을 느낀다. 


누군지 모를 현실 속 비난의 대상이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단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끼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 원래 착한 놈, 나쁜 놈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가득한 세계일 뿐이다. 나 역시 그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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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1.



제임스 완은 사람 졸이게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 서스펜스라고 하는 것과 공포영화라고 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뻔한 것 같으면서도 끝날듯 끝나지 않는 심리적 압박감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쏘우를 보고 아 짱이다란 느낌을 받았는데, 그는 사람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서 밀려 오는 게임을 통해 죽을듯, 죽지 않고 터질듯 터지지 않게 긴장감을 끌고 가는 감각이 대단했고, 이번 컨저링에서도 그랬다. 내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말 노련한 기술이 필요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보는 동안엔 딴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어서 그렇지, 컨저링의 스토리를 돌아 보면 여느 공포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사간 집이 알고 보니 귀신들린 집이고, 과거에 뭔 일이 있었고, 운 좋게 극복하거나 또는 죽거나.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자지러지게 만든 건 제임스 완이 재능을 살려 공포영화를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컨저링의 한 포스터에는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라는 문구를 적어 놨다. 같이 봤던 친구는 '무서운 장면 안 나온다면서....'라며 말 끝을 흐렸다. 중반 이후에는 나올 거 다 나온다. 아마 처음부터 귀신들이 난리쳤으면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진입할 때 관객들은 이미 긴장했고 공포영화를 잘 못보는 이들은 지쳐있었다. 같이 간 친구는 뒤로 갈수록 작은 소리에도, 뭔가 튀어 나올 것 같은 장면에도 깜짝깜짝 반응했다.  


내가 고른 저 포스터가,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섭다는 그 문구가 공포영화의 핵심에 대해 말해준다. 무서운 장면으로 사람들을 무섭게 만들 수 없다. 스크림류의 살인 영화는 모든 걸 다 보여주기 때문에 무서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살인자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압박감에서 공포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시도하지만 성공하기 어렵다. 컨저링이 나오기 전에도 몇 년 간 제대로 된 공포영화가 없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나왔을 때 감명 받고 그 이후에 주목할만한 공포영화가 있었나 싶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도 그랬지만, 공포영화의 미덕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공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소리를 내보내면 사람들은 긴장하고 준비한다. 뭐가 튀어나올 것 같다고 상상하며 쪼그라 든다. 그 때 카메라는 천천히 배우를 중심으로, 혹은 배우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며 뭔가 튀어 나올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컨저링의 초반부에는 소리만 나온다. 소리만으로 사람들은 충분히 긴장한다. 뭔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관객 스스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알프레도 히치콕의 '탁자 밑 폭탄'의 예가 서스펜스를 잘 설명해준다.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감과 불안이 서스펜스라면. 공포영화는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장면에서 음악, 조명, 카메라워킹 등을 통해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다. 잘 된 공포영화가 없는 건, 잘 된 서스펜스 영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냥 소리지르고 잔인하면 공포영화가 될 수 없다. 서스펜스가 있어야만 한다. 


소리만큼이나 공포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조명이다. 저 포스터에도 나왔듯 어둠을 강조하는 것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빛을 통제해 어둡고, 필요한 장소에 최소한의 빛을 집중한다. 관객들의 시선을 이끄는 것이다. 관객의 시선은 빛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관객의 시선에 대해 동선을 만들고 갑자기 동선에 변형을 주어 시각적 자극을 만들어 내곤 한다. 


공포영화는 결말이 나올 때 쯤이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서스펜스가 끝나기 때문이다. 상황이 종료되면 긴장은 풀리고, 적절히 마무리 못하면 엄청 유치해진다. 컨저링이 성공한 이유를 하나 더 뽑자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을 갖게 만든다. 요즘 같은 때 아무도 죽이지 않는 공포영화를 찾기 힘들다. 


앞에서도 스토리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 영화 내 각각의 요소는 새로울 게 전혀 없었다. 악령과 엑소시스트, 사물, 기독교, 빙의, 동물-새, 초자연적 현상 등 기존의 영화에서 사용해왔던 오컬트적 요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화다. 기막힌 반전도 살인도 없이, 엑소시즘이라는 전통적인 주제에, 절제된 표현까지. 컨저링은 클래식한 공포영화다. 제임스완은 자신이 가진 서스펜스의 재능을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틀에 집어 넣었고,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오컬트 영화를 좋아 하는 나에게 컨저링은 보기 좋았다. 본격 오컬트라고 하기에는 전형적인 공포영화에 가깝지만, 이런 소재를 다뤄 성공한 영화가 근래에는 없다. 아마 배우가 바뀌고 똑같은 내용에 비슷한 연출을 해도 또 즐거워 할 것 같다. 공포영화는 원래 그런 거니까.


그리고 공포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역시, 여자와 함께 극장에 가야 한다는 것. 잘 된 공포영화가 좀 더 많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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