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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1.



블록버스터에서 보기 힘든 진지함을 가진 시리즈였다. 마지막 프리퀄은 더 비극적이고 은유적이었다. 인간은 무엇인가란 대주제는 앞선 두 편에서 어느 정도 제시됐고 3편에서는 인간의 광기,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3편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2차 대전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시저의 아내와 자식들이 암살당하는 모습은 1차 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된 사례예보 사건을 떠올리게 했으나 유인원이 갇혀 강제노동을 하는 모습은 아우슈비츠를, 변형 바이러스에 걸린 인간을 죽이는 건 우생학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끝까지 붙잡는 대령의 모습은 패망 직전 독일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이런 구도를 맞추기 위해 끼워넣는 연출이 종종 보였으나 진중한 접근이 단점을 어느 정도 상쇄시켰다. 


단점들이 부각되지 않고 설득력을 갖는 건 유인원들, 그중에서 시저의 캐릭터 존재다. 이 시리즈 전반에서 인간은 이성에 매몰된 맹목성을 보이는 반면 유인원들은 감정적이고, 그래서 선택에 대한 고뇌와 신념을 가지고 있다. 시저는 아내와 자식들의 죽음에 분노해 코바처럼 인간에게 대항하기를 결정한다(코바와 다른 건 그 분노를 개인적으로 한정시킨 것이다). 시저의 부정한 분노는 불의에 맞서는 정의로운 분노로 변하고, 마지막 순간 과거의 시저처럼 인간과의 관계를 맺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평화를 예비한다. 이러한 시저의 변화는 시리즈 마지막에 지구를 지배하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관객들이 긍정하게 만든다. 


-어설프거나 식상할 수 있는-분노의 전환을 매끄럽게 만든 영화적 도구는 백인여자아이다. 민간인을 죽인 시저의 행동은 가족을 잃은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지만, 복수의 굴레일 뿐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자 유인원과 인간의 화해를 상징하게 될 여자아이의 등장은 시저와 유인원들을 위한 배려였다. 여자아이가 유인원 강제수용소로 걸어들어가는 시퀀스는 이번 혹성탈출 시리즈와 어울리지 않는 미학이었지만, 3편의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도전이기도 했다. 시저와 유인원들에게 감정이입된 관객이라면 이 장면에서 비극과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리라.


여자아이가 시저 일행에게 받아들여질수록 여자아이 아버지를 죽인 시저의 악행이 떠올라 비극을 키웠다. 이 아이러니는 인간이 변종 바이러스에 의해 유인원화 될 것을 암시하며 갈무리된다. 지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인간의 일이면서, 유인원의 일이었다. 유인원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인간은 거대한 자연에게는 패배하며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유인원은 인간에게 패배했지만 자연에 순응해 살아남는다. 다른 종이지만 선함과 악함이 닮아있는 것, 후대에 등장할 혹성탈출 본 시리즈에서 또 다시 이 관계가 뒤집어질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시리즈에 어울리는 결말이었고,  전체로도 훌륭한 프리퀄 시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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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1.



사과. MBC 기자들은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나와 사과했다. 그동안 무엇을 했냐는 국민의 질책을 달게 받는다 했다. MBC 막내기자 3명은 MBC 정상화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호소를 하며 또 사과를 했다. 국민들이 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걸까, 그들이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그건 사과라기 보다 도움을 구하는 낮은 자세였다. KBS와 MBC가 힘을 합해 공동파업을 하고, 여의도 광장을 빌려 사람들을 그득 채울만큼 파업의 기세가 대단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자조적이다.

파업은 언론인의 투쟁도구이기보다 노동자의 투쟁도구다. 언론인도 노동자이기에 말장난스럽지만, 언론인을 단지 노동자라고 규정짓기엔 특수함이 있고, 그 특수함 때문에 사과했으리라. 언론인이 가진 도구를 빼앗겼을 때 정체성을 빼앗긴 것이고, 남아 있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붙잡아 싸웠다. 노동자의 싸움은 길고 길다. 긴 시간 '얼굴'만 달리한 권력은 집요하게 파업참가자들을 물어뜯고 끌어 내렸다. 권력은 무섭게 그 자리를 '대체재'로 다시 채웠다.


준비된 자. 김장겸 신임 MBC 사장은 과거부터 차근차근 올라간다. KBS 고대영 사장도 아주 긴 시간 차곡차곡 그 자리에 올랐다. 태극기 집회에서 스타가 된 아나운서는 먼 미래를 그리며 그 자리에 섰을 것이다.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 '준비된 자'들은 목표의식이 뚜렷했고 원하는 바를 얻었다. '픽션'에서는 치미하게 계획을 세운 악당이 정의 앞에 무릎을 꿇지만 '논픽션'은 그렇지 않다. 언론인의 목적은 두 가지다. 흔히 알고 있는 '비판자'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권력자를 지행하는 것이다. 언제나 '대체재'는 준비되어 있다. 


언론인. 이상적인 언론인의 이미지는 일간지 기자보다는 탐사보도를 하는 기자에 가깝다. 냄새를 맡고 사건을 캐내 조리 있게 다듬는다. 그 과정엔 위험과 수모와 노가다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서 본 '언론'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보신과 침묵, 명예를 존중했고 언어는 죽어 있어 숨이 막혔다. 졸업 후 다양한 '진보적' 행사에 얼굴을 들이민 한 언론교수를 볼 수 있었지만, 얼굴을 비출 뿐 일은 하지 않다. 이후에도 그의 이름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언론인과 언론학자는 무엇이 다른가.교수들은 언론인이 아니고 언론학자였다.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학생을 언론학자가 가르칠 수 있는 걸까.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은 배운 적도 없는 '비판자' 이미지를 어떻게 좇게 된 걸까. '비판자'를 좇는 학생도 있지만 그보다는 '준비된 자'가 되려는 학생이 더욱 많았다. 기자의 본모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분노. 최승호 PD는 이전 이전 다큐 <자백>에서 보다 더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선배라는 존칭을 써가며 인터뷰를 따려는 그의 심정을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쉽지 않았지만, 그 감정 중 분노가 자리하고 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으리라. 암에 걸린 이용마 기자를 보는 시선이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언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일 테다. 자랑스러움은 아니었다. 자조가 섞였고, 해고 당한 그 시절처럼 여전히 싸우고 있는 위태로운 자신을 비췄다.

언론을 망친 그들에 대한 본노는 담겼지만 <공범자들>은 좋은 거리감을 유지한다. 특정한 사회문제를 고발하려는 다큐는 심한 감정이입과 엉성한 완성도로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대다수다. 최PD는 전작에서도 그랬듯 노련한 언론인답게 극적 긴장감을 위한 구성보다는 사건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며 논리의 완성에 많은 힘을 준다. 다만, 언론 장악사가 그에게 패배가 서린 '아픈 손가락'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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