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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6.



 그녀는, 어떤 면에서 완성된 인간형이지만, 그건 그녀 스스로 만든 모델의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 훌륭한 인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이 유형화돼 있어 어느 정도 사례를 쌓으면 그녀가 만든 정체성,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데 꽤나 강한 의지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답게 그녀는 원하는 정체성을 견고히, 그리고 쉽사리 틈을 내거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 유능함을 그런 곳에, 아주 정열적으로 쓰고 유지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는 모습이 아쉽다. 그래도 완성이란 표현을 유지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지적 호기심은 왕성하다. 특히 그녀가 전문분야로 여기는 군사, 여성이란 주제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최근 '군사'의 주체, 여성성의 억압 주체로 국가를, 또 그 국가가 행하는 폭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실제 사례를 통해 경험을 쌓고 있다. 그 또래에 비해, 혹은 좀 더 어른 연배의 다른 이들에 비할 때도, 그녀는 많은 시간 전문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은 이미 패턴화돼 생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삶에서 우선 순위인 것이다,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때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붇는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갉아먹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추후 자세히 설명토록 하겠다.


 그녀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나름의 수준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건, 그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보다, 이 지적 호기심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생활의 결과처럼 보인다. 그녀의 생활 패턴은 '-홀릭'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홀릭이란 표현 앞에 지식, 지적, 공부, 연구 등의 단어를 붙이기엔 약간 무리가 있는 느낌이 들어 어떤 홀릭이라 구체적으로 명명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 자체는 필요 이상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 듯 보이며 집착스런 모습을 종종 보이기에 홀릭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그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그녀는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는데, 분야를 가리지 않은 채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모습이나 업무와 관계없는 영역의 정보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보았을 때 지식 자체를 습득하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다양한 사례들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번은 군 관계자와 그녀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미군함(인 것으로 기억한다)의 용량을 그녀가 맞춘 일이 있었다. 오히려 군관계자가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그녀는 두고두고 자랑했다.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는 일이 잦지 않았음을 생각한다면 드물게, 거의 유일하게 즐거워하며 이 일을 반복적으로 자랑했다. 그녀는 이겼다는 표현으로 이 사건의 결과를 정의했다. 군사 관련 전문가와 일종의 게임을 했고, 이긴 것이다. 민간인으로서 군인의 지식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녀는 다른 이에게 상담해주길 바랐는데 특히 여성과 관련된 일일수록 더욱 관심을 보였다. 연애나 사랑, 생리적 현상, 사회적 성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했고 가끔은 그녀의 호기심을 피하기 위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할 정도였다. 그 '오지랖' 때문에 몇 차례 사람들은 불편함을 겪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무라 생각하는 듯 타인의 시선은 괘념치 않았다. 다른 이의 어떤 고민을 상담해주겠다, 공감하겠다는 그녀의 목적에 비해 본다면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고민거리를 안 겼으니 말이다. 일을 같이 하는 동료 몇몇은 그녀에게 여성(상담)전문가, 심리전문가라고 불렀고 그녀는 이를 아주 즐겨했고 당연하게 여겼다. 한 번은 사람들이 또 그녀를 심리전문가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그녀 앞에서 코웃음을 쳤던 일이 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싸움(토론)을 즐긴다'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그녀가 실제 격렬하게 토론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동의나 '승리'가 전제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지식과 유능함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대부분의 상황에 개입하긴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결론과 다른 결론에 반박할 수 없다면 상황 자체에 침묵하고 무기력해진다. 순식간에 '고뇌'하는 모습을 갖춘다. 사소한 것들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종종 봤지만(관심 없다, 관심 없어하려 한다는 게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한 차례 선거를 준비하며 이런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선거를 함께 준비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후보의 컨셉, 선거 전략, 인력 운영 등 이미 중요한 대부분의 사항이 몇몇에 의해 결정(‘몇몇’을 '그룹A'라 부르겠다)되었고, 나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실무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통보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여러 사안들을 주요하게 논의하고 결정하는 '그룹A'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주로 후보의 '정치적 캐릭터'를 잡는 역할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선거를 이끌어 갔던 '그룹A'은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실패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선거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회의가 진행됐고 선거의 전략과 준비에서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그녀는 몇 차례 방어를 시도하는 듯하다 곧 입을 닫고 무기력해졌다. 평소 선거에 열정을 쏟으며(그녀는 새로운 '지식거리'를 습득하고 '안다'를 드러낼 기회였다)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룹A'에 포함되어 있던 이는 두 명이 회의에 참여했는데, 그녀는 그 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이 쩔쩔 매며 회의에서 지적된 사실을 잘 반영하겠다 말 했지만 결국 문제점은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녀는 회의가 진행되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세계에 빠져 버린 듯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그녀와 그녀가 속한 '그룹A'와 전혀 무관한 사실, 단지 선택을 고려할 하나의 정보에 불과했고 그녀는 정보를 차단하는 편을 선택했다. 선거 이후(당연히 실패했다) 그녀의 평가는 '사람들이 잘 따라와 주지 못해 아쉽다'였다. 선거의 실패 역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회의에서 발견했듯, 그 순간부터 선거와 관련해 그녀는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그룹A'는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수집, 분석과 같은 기획 단계가 -터무니없이-모조리 생략됐다. 놀라웠던 건, 객관적 자료는 아무것도 없이 문 닫힌 방에서 '그룹A'의 구성원이 모여 주관적인 정견, 분석만을 가지고 선거의 모든 플랜을 기획했다는데 있다. '그룹A'의 이러한 행위는 그녀의 성향과 거의 일치한다. 습득한 지식과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그녀는 학술적 과정, 연구 방법 등을 충분히 습득했지만 가끔 그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 검증 받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객관적으로 정보, 사실이 판단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안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주관성이 객관성을 덮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녀에게 안다는 것은 내재적 행위가 아니라 외향적 행위이며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은 결국, 객관성이라는 것은 그녀가 구축한 것 안에서의 객관성이지 객관적 사실의 나열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나아가고 만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꼈다. 그녀의 이 말은 나를 놀라게 했고 아득하게 만들었다. 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표현이지만 현실세계에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는 멀고 먼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제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십대 초중반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한동안 몸이 꽤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통스러웠다고, 괴로웠다고 한다. ‘세상에 모든 고통’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난 그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채식을 하게 된 이유는 죽어 가는 것들에 대한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고통을 ‘안다’고 했다. 대단한 사람이라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곧 그 말은 나에게 모든 의미를 상실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낀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말해주는 표현일 뿐이다. 고통이란 표현은, 그녀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라고 했지만,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통이란 표현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은 그녀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여겨서다. 몸이 아프다라는 물리적 조건, 어떤 존재의 무상함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감정에 기초하는 고통. 어떤 의미에서 그녀가 자신의 고통을 세상의 모든 고통이라고 여겼는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말은 학술적인 지식 외에 고통이라는 주관적이며 감정적, 추상적 표현까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걸 보이고자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했다.


 



 그녀에겐 4년, 5년 동안 만나온 애인이 있다. 그전에도 몇 차례의 연애를 했고 긴 시간 동안 만났던 대상이 있다. 연애, 사랑에 대해 초탈한 듯 웃으며 ‘그런 것쯤이야’란 분위기를 숨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이를 먹은 한 여자가 여유롭게 젊은 연인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모습을 바랐다. 다른 동료의 연애나 사랑 얘기를 낯간지럽게 즐겨했다. 사랑에 대해 ‘안다’는 그녀의 태도는 어김없이 드러났지만, 사랑일까, 나는 조금 서글펐다.


 사랑은 완벽한 타자성의 실현이다. 사랑을 하며 경험할 수 있는 건 나와 타인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하나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섹스의 쾌락은 나의 쾌락이다.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며, 예술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른 경험에 기반 한다.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깨닫는 것, 타자성에 대한 겸손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인들에겐 끊임없는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 타자성을 이해하고, 서로 건널 수 없는 공간을 줄여 가는 노력이 사랑의 주된 행위로 나타난다. 그녀의 사랑은 얼핏 보기에, 결과적으로, 사랑의 완성된 형태처럼 보였지만 사랑의 중요한 전제가 결여된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연인이라 할 수 있는 이성과 최근 동거를 시작했지만, 성적인 결합의 열망이나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가 아니라 생활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주거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 둘은 서로의 영역에서 충실히 열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서로에 대한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속박하지 않으며 거리를 인정하고 서로가 존재함을 즐기는 사랑은 내가 바라는 사랑의 모습과도 닮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나는 타자와의 거리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난 타인의 사랑을 항상 부럽게 여기지만, 그녀의 사랑은 나에게 부러움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함께 일하던 동료가 그만 둔 일이 있었다(그녀의 동료이자 나의 동료다). 그러자 그녀는 심한 자책감에 빠졌다. 그 사람이 그렇게 고통 받고 괴로워할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나는 다시 아득해졌다. 왜 그녀가 괴로워하고 심각하게 고뇌에 빠져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왜 그런 의무를 스스로에게 짊어지우는 것일까. 그 동료가 그만두는 동안 자신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음에 심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전혀 놀라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자리를 버티고 있던 걸 인정해야 할 정도로 잘 참아 왔다. 나와 몇몇은 그가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눠왔다. 퇴직을 결정하고 통보한 날, 그의 괴로움을 알고 있던 동료 몇몇은 역시 괴로워했지만, 나는 그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크게 서글프거나 괴롭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는 편이 그에게는 도움이 될 결정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발생한 일련의 행위들과, 그의 표정, 분위기 등을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봤다면 누구나 그의 퇴직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퇴직을 인식한 순간, 그녀에게 고통이 발생했다. 고통은 그 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녀 옆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고통을 인지한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고통을 만들어내 자신을 가학하고 있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퇴직한 동료와 교류, 교감이라 부를 게 거의 없었고, 퇴직은 한 이의 입장에서 그녀 역시 -작은-하나의 이유였다. 그녀는 퇴직한 동료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여러 차례 되뇌었지만, 그건 퇴직한 이와 그 공간에 존재하는 고통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아니라 그저 그녀가 만들어낸 주관적 고통에 불과했다. (우습게도)퇴직한 동료는 며칠 뒤, 여러 이유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녀는 열심히 그의 눈치를 봤다. 돌아온 그와 한 팀에 속한 이들이 회식을 갖겠다고 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 따라 갔다. 그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책과 동료의 퇴직을 막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그녀를 그 자리에 이르게 했다. 후에 확인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따라간 상황을 역시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여겼고, 그 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었던 돌아온 동료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녀의 성격에 비춰 봤을 때 이해할만한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그녀를 관찰의 대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심지어 객관적 고통까지 만들어 내는, 그 주관성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를 ‘안다’는 행위에 집착하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그녀가 쌓은 방어벽 같은 지식들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건 그녀의 것도 아니며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보편적 성격의 것들일 뿐이다. 또한 그녀의 행동과 행위는 그러한 지식들과 무관하게 발생하며, 중요한 건 주관성에 의해 그녀 삶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쑥불쑥이랄까, 타인과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는 그녀의 행위는 주변인들에게 어떤 불편함을 발생시켰다. 그녀 ‘밖’에 존재하는 그러한 이질적 감정의 결과물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그녀 주변공간을 부유할 뿐이었다. 이제는 그런 역할을 거의 상실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녀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녀는 타인에 대해 알기 원하고, 이해하길 바라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이의 이야기를 꽤나 경청하는 태도를 보인다. A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나름 이해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내재된 갈등과 문제점을 분석해 해결하려는 의지, 의무를 만든다. 갈등 해결을 위해 A의 이야기는 B와 C에게 전달된다. 그녀의 충분한 해석이 덧붙여져서. 나 역시 한두 차례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가 엉뚱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등골이 서늘했다(나는 나를 어디서나 감추길 원한다). 나의 이야기가 내 해석과 의지는 담기지 않은 채 타인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아주 밀접한 곳에서, 아연실색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행위를 반복했고, 나는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 자체를 ‘실수’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 이야기에 담긴 부정적인 지점은, 고쳐야할 것이 되고, 결국 문제해결의 최종 대상은 ‘나’로 귀결된다. 문제해결의 주체는, 당연히 그녀를 포함한, 타인이 된다. 그녀는 ‘중재자’로서, 이야기가 오가는 대상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오가는 ‘정보’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 여기고 문제해결 방식 또한 객관적이라 생각한다. 고여 있는 정보와 감정들이 유통되지 않는 걸 못 참겠다는 듯 행동했다. 나는 얼핏 이 사실을 느끼고 그녀 앞에서 입을 다물게 되었지만, 한 동료는 꽤나 곤혹을 겪은 후에야 입을 다물게 되었다.


 ‘사회생활’에서 본다면, 혹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역할을 하는 이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확성기-스피커와 같은 역할이나, 아부를 위해 동료를 모함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그녀 주변에서 발생하는 문제해결을 위한 주체를, 모두 그녀로 설정하는 본능적 행위를 반복한다. 앞서 동료의 퇴직을 보고 어떤 의무감을 만든 것과 동일한 행위가 반복되는 것이다. 선의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악의를 담고 있다 할 수는 없다. 이는 몇 명이 모인 조직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도 적용할 수 있다. 문제가 발생한다, 사건을 인식하면, 관련 정보를 탐색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책임감을 짊어진 채, 해결책을 탐구한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 속에서 고통을 겹겹이 쌓고 스스로를 갉아 먹는다. 누구도 그녀에게 더 이상의 책임을 부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는 많은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게 그녀가 바라는 그녀의 모습이지만.


 


 안다는 것과 아는 것을 실제 행하는 것. 그녀 안에 내재된 이 공식이 그녀를 움직인다. 이 공식을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실천하는 지식인’이란 표현을 쓸 수도 있다. 물론 그녀가 절실히 원하는 역할이지만, 행위의 주체와 사고의 흐름이 모두 그녀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공감(empathy)’이라 부를 수는 없다. 실제 그녀의 업무는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이 주다. 하지만, BR에 대해 쓰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 안에서 결국 타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항상 타인을 끌어안고 산다 여기지만, 그녀 안에 있는 건 그녀이자 그녀가 만든 것일 뿐 타자의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행위의 강도가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알고 있다 여기는 것- 나타내며 반대의 경우가 성립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 알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두지 않고 무기력해진다. 그녀처럼 세계를 해석하고 반응한다면 아마 질려버릴 것이다. 그녀는 항상 지쳐 보인다. 그 피로감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 받는다.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지만 안다는 사실을 유지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도한 이미지에 고정시키기 위해 무기력함(‘피로감’이 아니다)을 숨기고 싶어 한다.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들은 그녀에게서 지워지거나 부정한 것으로 취급된다. 혹은, 적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약속된, 비교가능한 객관적 기표들의 세계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주관적 기의의 세계, 특히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내면에 대한 기의를 다룸에 있어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이란 기의를 보편적 기표로 환원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폭력의 발생은 예견될 수밖에 없다. 인간을 기표로 다루려면 극한의 섬세함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어쩌면, 애초에 기표로 해석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은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동일한 사건, 정보를 접했을 때 동일한 기표로 해석되는 대상만을 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그녀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잘 안다고 인정받길 원한다. 그러한 인정에는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녀가 안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객관적 기표들의 세계라 부를 수 있을 만한 '학술적 세계'에서 그녀는 충분히 인정받는다. 그녀를 둘러 싼 갈등의 지점은 너무 많은 대상을 안다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에 있다. 특히 안다는 행위가 불가능에 가까운 인간에 관하여 말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녀의 앎에 동의하지 않는 주변인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를 다루는 방법이 관계를 다루는 그녀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안다는 것을 설득시키거나 인정받기 위한 짧은 과정을 거친 후 동의하지 않을 경우-실패 시- 무기력해지거나 적의를 갖는다.


 그녀가 타인의 관계들에 개입을 당연시 여기는 건 그녀가 사건-상황을 잘 알기에 공유가능한 객관적 정보, 기표들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것까지 주관적 기표로 코딩하여 타인에게 제시한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일하는 동안 그녀의 갑작스런 업무지시에 -나를 포함하여-몇몇의 동료들이 당황한 경험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녀로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자신이 제시한 바는 앎을 전제로 한,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치뤘던 선거 이후 그녀의 '사람들이 따라와 주지 않아 아쉽다'는 발언의 맥락은 이러한 인식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애초에 공적, 사적인 영역의 구분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가 세계를 '이분'하는 기준은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그녀의 앎에 동의하는 이는 가까워질 수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이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동료들이 그녀의 정체성에 맞추길 거부하는 이유는 타인을 자신의 앎의 영역에 포함시켜 다룰 수 있는 대상정도로 바라보는 것에 있다. 그녀가 소유한 지식은 그녀의 행동을 위해 정립되지 않은 정보무더기다. 지식을 소유하려는 강한 욕구는 인간을 하나의 기표로 다루려는 태도로 나타나며 사람은 그 무더기에 차곡차곡 쌓인다. 중재자, 상담자의 역할은 인간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행한 결과다.


 사람 간의 거리는 그녀에게 무의미하다. 그래서 주변인과 그녀와 일종의 암묵적인 긴장과 갈등이 형성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의 강한 주체성은 종종 그에 비견할 만큼, 존재의 근거를 위해 강한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영역에 있다 여겨지는 이는 자신의 일부로 끌어들이지만, 자신이 포함할 수 없는 이는 강력한 타자로 존재하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과정은, 본인이 원한 결과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주변인들 사이에 권력지형을 발생시킨다. 즉, 피아가 형성된다. 자신을 위협할 가능성이 없는 이에 대하여, 자신의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이에겐 ‘아는 것’의 행위를 반복하며 관계를 다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해선, 자신의 앎을 인정하는 이들에게, 그녀가 만든 타인의 정체성을 정보화해 유통시킨다. 이는 그녀가 가진 지위를 충분히 이용하는 것으로, 의도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럽다고 표현이 어울린다. 앞서 ‘중재자’의 역할을 소개했었는데, 유통의 과정은 타인들을 중재하는 과정에 주로 녹아들어 나타난다. 다만, 그녀가 만드는 타자의 정체성이란 건 결과적으로 부정적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중심으로 한 피아의 권력지형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강한 독립성과 사랑의 형태를 볼 때 자신의 세계에서 안정하고 싶은 욕망이 존재함을 추측한다. 나는 그런 모습에서 그녀다움을 느끼곤 했다. 자신의 주변을 공고히 하는 행위는 그녀의 안정이자, 생존과 관련된 본능적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안정을 원하는 만큼이나 그녀는 특별해지고 싶어 한다. 그녀는 아마 이 내적 갈등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악의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 생각한다. 이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전략이고 갈등이니까. 다만, 언제나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은 특별해지기 위해 필요한 게 더 많을 뿐이다.


 동료들과 제주도의 바닷가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시멘트로 둑을 높이 쌓아둔 길이었고 바다 쪽으로 배정도 높이의 턱이 있었다. 밤이었고, 바다는 뭉글거리며 살아 있음만 볼 수 있었다. 바람도 제법 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어두운 바다를 보면 뛰어 들고 싶어. 지금 너무 참기 힘들어. 여러 명이 둑을 따라 걷던 중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어두운 바다에서 죽음의 충동을 발견한 듯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그녀의 쓸쓸한 웃음을 보며, 나 역시 깊은 쓸쓸함을 느꼈다. 죽음이란 내밀한 심연까지 드러내며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외로운 존재인가, 그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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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7.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이야기가 뜨는 걸 보니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1.


소설 쓰기에 입문할 때 잘 쓰인 작품을 필사하며 연습하는 방법이 있다. 신경숙이 대표적인 케이스. 나이가 좀 차서 문창과를 다녔는데 젊은 이들의 '재기'를 따라갈 수 없어 우직하게 필사를 시작했고, 어느 날 오정희의 단편을 필사하다 '그분'이 오셨다는 이야길 들었었다. 그 후 성공한 작품을 써냈고, 콧대가 높아져 터치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었다고.


뗀 첫발이 필사였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고, 방송작가 시절 좋은 글귀를 대본에 쓰던 습관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손에 베인 습관이 흘러나온 게 아닐까란 생각.



2.


신경숙 표절 건이 더 공분을 사는 건 그 동안 알면서도 쉬쉬했다는 거다. 신경숙이 하이클래스 작가이고, 이런 잘나가는 작가를 문단의 어른'들이 건드려 말썽 일어나는 걸 원치 않아 곪았다는 주장이다. 분위기가 그렇다는 건데 내가 작가나 관련 업에 종사하는 게 아니라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찧기 뭐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예전에 일을 쉬며 글이나 또 써볼까 싶어 들을만한 수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문학상 준비반이란 게 있더라. 놀랐다. 어떻게 써야 상을 받을 수 있을지 방법이 있다는 소리다. 현 작가가 한 두 달? 정도 클래스를 운영하고, 적지 않은 비용을 책정해놨던 기억이 있다. 책도 못내고 그저 지망생에 불과한 예비작가들 주머니 사정이야 뻔할 텐데, 서글프고도 좆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 바닥이 망했구나.


이후에 현업 소설가가 하는 수업을 하나 들었다. 한겨례문화센터에서 하는 그런 강좌였는데, 모르는 작가였다. 문체에 관련된 수업이었고, 그 여류작가는 문체가 좋기로 그 바닥에서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다 했다. 수업 몇 번 듣고 과제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거나 '묘사'해서 써오라고 했다. 소설 형식을 빌어 병원 대기실을 묘사하는 글을 써 갔고, 이내 비평 시간이 진행됐다. 이래서 안 되겠구나를 다시 한 번 느낀 순간이었는데,


과제는 자유형식으로 묘사를 해오라는 거였지, 소설을 쓰라는 게 아니었다. 나도 소설을 쓸 생각이 없었고, 소설형식을 빌어 쓰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그 작가는 갑자기 주인공은 몇 살이며, 배경은 어떻느냐, 병은 무엇이냐, 입원을 했던 경험이 있느냐, 이 병원은 또 어떤 병원이냐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게 소설의 기본이라고. 그날 따라 유난히 전부 소설처럼 과제를 해왔는데 다 마찬가지였다.  


수업의 분위기는 그저 그랬다. 내가 왜 그 공간을 묘사했고, 무엇을 묘사하려고 했는지도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런 게 소설이라고, 소설을 쓰려면 그런 기본을 갖추어야 쓸 수 있다고 했다. 수업이 끝난 후 눈 인사만 나누던 한 두 명에게 잘 읽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내입으로 이야기하기 그렇지만, 내가 쓴 과제 수준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음 수업 시간, 그 소설가는 다시 소설을 쓸 때는 원래 그렇게 한다고 입을 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틀에 맞춰 작품을 갈아 내기 시작하면 결국 아무런 생명력도 없을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말이다. 소설을 잘 쓰는 방법이 정해져 있고, 그걸 심지어 '수상'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다는 거다. 대학 시절 비평문을 쓰고 꽤 날카로운 비평을 나누던 수업이 있었다. 비평문은 사실관계와 논리가 가장 중요하니 꼼꼼히 따질만한데, 소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소설도 예술 장르로서 엄격한 형식이 있지만, 소설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심지어 '소설'이란 형식은 개화기 시절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이다. 


예전 어디서 봤던 실험 결과에서, 같은 문학 동아리의 크리틱 방법을 단점을 강조하는 집단과 장점을 응원하는 방식의 두 집단으로 나눴고 10년 후 쯤 장점을 응원하던 집단이 더 좋은 작가들을 배출했다는 걸 보았다. 내 생각이 바로 이 실험 결과와 동일하다. 누군가에게 굳이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단점보다 긍정적인 점을 강조한다. 그게 사람마다 다른 개성이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단점은 여러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기준'에 부합하지 않거나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걸 지적하는 행위이다. 


우리 나라에 판타지, 웹툰, 영화 시나리오 바닥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재밌는 아이디어가 많은 건, 순수문학으로서 강조된 '소설'이 진입장벽을 높여 개성을 질식시켰기에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난 결과다. 3~4년 전 젊은 작가상이란 단편소설집을 사 읽다가, 덮고, 잊을만하면 다시 열다 읽다 덮고를 몇 번 반복 끝에 겨우 다 읽어냈다. 상을 받은 작품들이 당대 소설의 형식에 부합할지 모르지만, 읽어낼만한 서사나 재미를 느낄만한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 파이가 적어지면 기존 조직은 보수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있는 거라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 악순환으로 고인물이 되고 조직은 퇴보한다. 소설판이 딱 그 꼴이다. 기존의 작가들은 소설의 형식을 강조하며 개성을 갈아버리기 급급하고, 그로 인해 거세된 재미는 다시 소설의 파이를 작게 만든다. 수상 타이틀이 없으면 작가 타이틀을 달 수 없으니 '원로'들이 권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은 딱 좋게 갖춰져 있다. 



3.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건 기록의 목적도 있지만, '재미'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소설의 형식이 없어도, 우리 나라는 오랜 기간동안 다양한 형식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전해왔다. 소설의 문체를 읽는 맛도 중요하지만 좀 더 이야기의 본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신경숙이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이 있다면 굳이 다른 이들의 묘사를 표절하면서까지 문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리고 신경숙이 문단에 없더라도 그 뒤를 받쳐 줄 젊은 작가들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면 신경숙의 표절을 이렇게 쉬쉬하며 덮지 않았을 텐데. 건강한 조직이라면 이런 문제를 쉬쉬하며 넘어가려는 윗대가리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지 않을 텐데. 


신경숙 얘기 짧게 기록하려 했는데 느닷없이 너무 길어져 두서없지만, 이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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