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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1.



뭔가 더 노골적인, 찝찝한 끈적거림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왠지 색계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랄까. 그러나 이 영화는 양조위와 장만옥 서로의 거리에 대한 영화였다. 왕가위 답다고 해야 하나, 어떤 여백으로 가득했다.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먼 곳을 보는 둘의 시선, 의미 없어 보이는 동선들의 겹침, 가로등, 비, 벽, 소음 등이 그저 영상에 담겨 있다. 영화는 많은 시각, 청각 정보를 순간적으로 전달 할 수 있다. 그래서 때론 여타 장르보다 정확한 묘사가 가능하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공유하는 국수집을 글로 묘사한다면 영상에 담긴 색과 미묘한 감정의 여백을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카메라의 속도를 조절하고, 서로 다른 공간에서 주고 받는 시선의 흐름 등은 영화이기에 가능하다. 글로 그 장면을 담아내려면 글에 어울리는 표현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럼 그 맛은 또 달라질테다. 왕가위는 자신의 영상언어를 완성한 장인이다. 


장만옥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기대했을, 또는 당연한 흐름으로 받아 들여질 육체적 관계는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화양연화를 보며 색계를 생각했다. 남여의 육체관계를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 그 영화는 화양연화에서의 과정과 달랐다. 물론 색계에서도 육체관계는 사랑이라는 커다란 범주에 속한 하나의 핵심요소다. 육체적 교감이 사랑의 다른 말은 아니었다. 불륜이라는 어떤 금기를 깨는 행위가 화양연화에서 다루는 사랑의 전부가 아니듯 말이다. 배우자의 외도로 시작됐을지도 모를 우연한 만남은, 그 의미가 계속 확장돼 '화양연화'가 된다. 


사랑은 결핍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정서적 감정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연인은 서로에게서 자신들이 바라는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때 싸운다. 그래서 넌 나의 일부라고,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아무리 많은 대화를 해도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타인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빠르게 떨어질 수 있듯,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해도 다시 찾게 된다. 우리 안의 결핍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시시포스의 바위와도 같은 것이다. 


요즘처럼 쿨한 게 멋진 게 된 시절에 왕가위의 사랑은 너무 느리다. 사랑에 빠지는 시간도, 사랑에 시달리는 시간도 너무 길다.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를 잃고 계절을 한 번씩 보내고 나서야 다시 들판에 서 그 시절 추억을 듣는다. 하지만 왕가위의 사랑은 너무 커서, 개인의 삶 전체를 흔든다. 사랑 이 전의 삶과 사랑 이 후의 삶은 달라진다. 우리는 어느덧 제자리에 돌아와 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달라진 낯섬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그 달라짐을 대하고,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사랑한다.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다. 얼마 전 연인과 헤어진 여자가 내게 물었다. 사랑하는데 왜 같이 있을 수 없는 거냐고. 사실 나도 이해할 수 없다. 식상한 유행가 가사라고 생각했던 말은 우리 주위에서 늘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더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서로를 잊을 수 없지만, 갈망하고 다가가려 하지만 언제나 그리워하며 쓴 웃음을 짓는다. 나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비웃을 때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은 애초에 이해로부터 발생하지 않기 때문일까. 마치 우발적 사건처럼 어느 순간 불쑥 '존재'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사랑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만큼 사랑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사랑이 후회가 되면 기억에 남는다. 그때 무엇을 더 잘했으면, 이런 말을 했으면, 어떤 행동을 했다면. 상대방을 더 잘 알았다면 사랑을 소유할 수 있었으리라 추측하기 때문이다. 진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지나간 시간으로 박제돼 끊임없는 고통을 상징한다.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한다. 시간에 고정되기 때문에 사랑이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쌓아 올린 결핍과 서로 쌓아가는 추억이 사랑의 몸체를 이루니까. 시간은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래, 언젠가 무너져 내린다. 시간이 더 흐르면 흔적마저도 사라진다. 이별한 그녀에게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라고 말했다.


장만옥이 양조위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잘 지내냐고 말을 했다면, 양조위가 예전 살던 집의 문을 열었다면. 그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그 둘이 어떻게 될지는 운명만이 알테다. 결국 그 둘은 만날 수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만나야 될 사람은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된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산다. 




00.


영화가 끝나고 밖에 나가려 했을 때 우산을 영화관에 두고 왔음을 알았다. 넋이 약간 빠져 있었다. 잠깐 달려 목적했던 카페 앞에 도착했으나 휴일이었다. 최근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기 기분이 나쁘지도 당황도 안 됐다. 작은 입구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자니 양조위와 장만옥이 비를 피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요즘 자꾸 시간을 거슬러 예전 생각을 한다. 더더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빛나던 시간을 찾으려고 한다. 지금에 천착해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뒤를 돌아 본다. 늙었다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는다. 어리숙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때지만 나에게 빛나던 시절이 있던 것 같다. 나는 서글프게도 벌써 추억을 딛고 사는 사람이 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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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30.




시놉시스만 보고 뭔가 뻔할 것 같은 이야기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당연히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잘 안 떼어졌다. 영화를 보고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든 생각은, 이야기가 큰 틀에서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파멸로 이르는 디테일은 예측할 수 없었으나 전작 돼지의 왕처럼 짜증날정도로 현실적이고 결국 모든 게 끝장날 거라는 그 느낌만은 살아 있었다.


찜찜함,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좆같음. 이 영화를 본 후 누구나 이 말을 뱉고 싶어 목이 간질간질 할거다. 같이 봤던 이는 치밀어오르는 찜찜함을 누르기 위해 소주를 마셔야 한다고, 한 번 들어가기 시작한 술이 멈추질 않았다. 우린 영화를 보며 착한 놈과 나쁜 놈을 나누는데 익숙하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난 후 밀려 오는 찜찜함은 착한 놈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게 너무 현실인거라.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취하는 건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희노애락을 맛 보기 위해서이지, 매일 같이 시달리는 현실의 좆같음이 다시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애니매이션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묘사하려고 한다. 묘사가 너무 실감나서, 사람들은 눈을 뗄 수가 없다. 


현실을 이루는 건, 시공간이고 뭐고를 떠나, 사람들이 매일을 살며 만드는 삶의 관계와 연속이다. 이 작품을 보고 딱 그말이 떠올랐다. 이야기를 짤 때 캐릭터를 잘 만들고 굵직한 공간과 사건 설정 해놓으면 캐릭터가 그 안에서 알아서 살아 움직인다는 말이다. 이 작품의 힘은 주요 3인방의 살아 있는 움직임이었다. 수몰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을 부여했을 때 그들이 삶을 살아 내는 방식이 애니메이션의 주된 흐름이다. 사회 구조가 좆같다고 느끼는 건 매일 정치 욕과 가족 같은 한국 기업들의 착취 구조 욕하는 것처럼 열은 받을지언정 큰 감정적 동요를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반면 특정 인물로 비난이 좁혀질 경우 우린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다.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리며,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새끼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한층 더 인간적인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사이비는 어떤 구조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 물론 각각 캐릭터의 역사를 쫓으면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 묘사하는데 무게를 둔다. 그래서 스크린 안에 현실이라는 지옥도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사이비의 스토리는 극단적이고 눈에 튀는 극적 장치가 몇 가지 있지만, 관객들은 캐릭터에 몰입한다. 난 사기꾼 캐릭터가 가장 좋았는데, 권해효의 더빙이 훌륭했다. 물론 다른 배역을 맡은 이들도 훌륭했다. 내가 사이비 종교 단체를, 사기꾼을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들어 봤을 법한 어투와 내용으로 대사를 줄줄 읊었다. 뭔가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고, 영화처럼 꾸며진 대화도 아니고,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말을 그대로 뱉고 있었다. 언뜻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을 보면 느끼겠지만-굉장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개새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김민철이 딸 등록금을 하루 만에 도박으로 탕진하고 애미자식을 구타할 때 우리는 현실 어딘가에 있을 개새끼에게 감정을 불러 일으켜 몰입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볼 때 뒷 줄에 앉은 여자 관객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영화는 찌듬과 짜증을 줬지만 울음을 일으키는 장면은 없었다. 같이 봤던 이와 나에게는 울만한 장면이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울만한 장면이 있었을 수도 있다. 민철에게 시달리다 자살한 딸에게 자신을 투영했으리라 짐작했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찜찜함은 사회 전체에 대한 울분이 아니라 누군가에는 구체적일 수도, 누군가에는 추상적일지도 모르는 가상 혹은 진짜 인물에게 집중된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 바로 길거리에서 마주쳐 지나가는 모르는 인간들이 만드는 이야기. 그걸 인정했기 때문에 찜찜함을 느낀다.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게 있어'라고 느낀다면 이 작품에 대해 혹평할 수 있다. 미적,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완성도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인간들이 애니메이션 안에서 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의 왕에서도 제목의 돼지는 반 아이들이었다. 사건을 묵묵히 바라 보는, 아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자에 붙었다 약자에 붙었다 하는 인간의 군상이었다. 돼지의 왕을 보고 학창시절을 떠올리지 않는 이 없을테고, 한 번쯤 학교 폭력이나 교육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엄석대의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듯, 돼지의 왕도 학교를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에니메이션이 아니다.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본능을 그리고 있을 따름이다. 사이비에서도 진짜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이다. 수몰될 마을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요 3인방을 뛰 놀게 만드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마을 주민 모두는 하느님이 아니라 천국을, 먹고 살 집을, 돈을 원하고 있다. 범죄의 재구성 엔딩에서 박신양이 이런 말을 한다. 사기는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고. 연상호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보고 더러움을 느낀다. 


누군지 모를 현실 속 비난의 대상이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단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끼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 원래 착한 놈, 나쁜 놈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가득한 세계일 뿐이다. 나 역시 그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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