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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1.



사과. MBC 기자들은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나와 사과했다. 그동안 무엇을 했냐는 국민의 질책을 달게 받는다 했다. MBC 막내기자 3명은 MBC 정상화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호소를 하며 또 사과를 했다. 국민들이 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걸까, 그들이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그건 사과라기 보다 도움을 구하는 낮은 자세였다. KBS와 MBC가 힘을 합해 공동파업을 하고, 여의도 광장을 빌려 사람들을 그득 채울만큼 파업의 기세가 대단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자조적이다.

파업은 언론인의 투쟁도구이기보다 노동자의 투쟁도구다. 언론인도 노동자이기에 말장난스럽지만, 언론인을 단지 노동자라고 규정짓기엔 특수함이 있고, 그 특수함 때문에 사과했으리라. 언론인이 가진 도구를 빼앗겼을 때 정체성을 빼앗긴 것이고, 남아 있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붙잡아 싸웠다. 노동자의 싸움은 길고 길다. 긴 시간 '얼굴'만 달리한 권력은 집요하게 파업참가자들을 물어뜯고 끌어 내렸다. 권력은 무섭게 그 자리를 '대체재'로 다시 채웠다.


준비된 자. 김장겸 신임 MBC 사장은 과거부터 차근차근 올라간다. KBS 고대영 사장도 아주 긴 시간 차곡차곡 그 자리에 올랐다. 태극기 집회에서 스타가 된 아나운서는 먼 미래를 그리며 그 자리에 섰을 것이다.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 '준비된 자'들은 목표의식이 뚜렷했고 원하는 바를 얻었다. '픽션'에서는 치미하게 계획을 세운 악당이 정의 앞에 무릎을 꿇지만 '논픽션'은 그렇지 않다. 언론인의 목적은 두 가지다. 흔히 알고 있는 '비판자'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권력자를 지행하는 것이다. 언제나 '대체재'는 준비되어 있다. 


언론인. 이상적인 언론인의 이미지는 일간지 기자보다는 탐사보도를 하는 기자에 가깝다. 냄새를 맡고 사건을 캐내 조리 있게 다듬는다. 그 과정엔 위험과 수모와 노가다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서 본 '언론'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보신과 침묵, 명예를 존중했고 언어는 죽어 있어 숨이 막혔다. 졸업 후 다양한 '진보적' 행사에 얼굴을 들이민 한 언론교수를 볼 수 있었지만, 얼굴을 비출 뿐 일은 하지 않다. 이후에도 그의 이름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언론인과 언론학자는 무엇이 다른가.교수들은 언론인이 아니고 언론학자였다.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학생을 언론학자가 가르칠 수 있는 걸까.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은 배운 적도 없는 '비판자' 이미지를 어떻게 좇게 된 걸까. '비판자'를 좇는 학생도 있지만 그보다는 '준비된 자'가 되려는 학생이 더욱 많았다. 기자의 본모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분노. 최승호 PD는 이전 이전 다큐 <자백>에서 보다 더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선배라는 존칭을 써가며 인터뷰를 따려는 그의 심정을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쉽지 않았지만, 그 감정 중 분노가 자리하고 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으리라. 암에 걸린 이용마 기자를 보는 시선이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언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일 테다. 자랑스러움은 아니었다. 자조가 섞였고, 해고 당한 그 시절처럼 여전히 싸우고 있는 위태로운 자신을 비췄다.

언론을 망친 그들에 대한 본노는 담겼지만 <공범자들>은 좋은 거리감을 유지한다. 특정한 사회문제를 고발하려는 다큐는 심한 감정이입과 엉성한 완성도로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대다수다. 최PD는 전작에서도 그랬듯 노련한 언론인답게 극적 긴장감을 위한 구성보다는 사건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며 논리의 완성에 많은 힘을 준다. 다만, 언론 장악사가 그에게 패배가 서린 '아픈 손가락'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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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5.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요, 그대의 마음이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말. 그러나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 무협영화를 좋아해 멋 모르고 다운 받아서 본 동사서독 리덕스는 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했음에도 절제 되고 정제된 대사들이 인상 깊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몸에 남겨진 과거의 것들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예전의 자리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우리가 언젠가 잃어 버렸을 법한 사랑, 혹은 후회의 순간들, 무엇인가 선택하지 못해 남은 앙금을 이야기한다. 같은 영화를 보지만, 영화가 끝난 후 모두 떠올리는 기억이 다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이번에 동서서독을 다시 개봉한다고 해 설레며 기다렸다. 처음 봤을 때 단절돼 보이는 옴니버스식 이야기와 연출을 못 따라가 전체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두 번째 봤을 때 스토리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고, 이 번 세 번 째에는 담담하게 볼 수 있었다. 얽힌 등장인물들의 관계도 미리 알고, 운명도 미리 알 게 되니 감흥이 덜 하긴 했다. 하지만 인물마다 주어진 이야기와 감정들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잘 된 영화들이나 이야기가 그렇지만 중요한 사건을 천천히 드러내거나 후반부에 툭 던진다. 이 영화가 특히 그러한데,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얽힌 실타래를 미리 알고 있으니 그 재미는 덜 했지만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대사의 양 자체도 많지 않다. 많지 않다고 느껴서 그런가, 누군가는 화려하고 과잉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의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컷이 빠르게 넘어 가고 미장센이 화려해 보이기에 속도감이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느린 영화다. 이 영화는 클로즈업으로 롱테이크를 가거나 한 인물을 화면에 꽉 차게 배치한다.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과 몸짓에 집중한다. 직접적인 대사를 던지기도 하지만 어떤 감정을 담아냄으로써 상황을 설명해나간다. 친절한 최근 영화들의 영상언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꽤나 지루함을 느꼈을 법하다. 동사서독의 매력이라면 화려한 배우들을 빼놓을 수 없을텐데, 연기력이 안정돼 있다. 배우들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할까. 임청하의 경우 굉장히 과잉되고 작위적인 몸짓과 감정연기를 펼친다. 정극 같은 분위기랄까. 그런데 그 캐릭터가 잘 어울린다. 황약사 역을 맡은 양가휘도 느끼한 한량 역할을 썩 잘 소화해내며 살짝 비웃음 머금은 듯한 쓸쓸한 웃음은 그의 과거 어느 지점을 추측하게 만든다. 양조위의 눈빛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가벼운듯한 표정에 담긴 깊은 눈의 장국영 또한 그 캐릭터에 아주 잘 맞았다. 모든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소화해냈다. 


임청하가 미친 연기를 할 때 저편에서 남자 하나가 키득키득 거려서 정말정말 거슬렸다. 캐릭터에 몰입되어 있고 양가위의 표현이 극화된 면이 있어 약간 부담스러운 장면들이 곳곳에 있긴 했지만, 감독과 영화 이름값으로 앉아 있던 사람들에겐 그저 유명 배우의 리즈시절정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왕가위는 이번 음악을 다시 만들고 넣어 만족스럽다고 했는데, 대사와 장면장면의 틈을 영화가 끊임 없이 메워들어가고 있었다.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애초에 여백으로 가득차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백을 비언어적 요소로 표현하려고 한다. 모든 이들이 어느 순간 사막에 와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지나간다. 그 응축된 한 순간은 삶 전체에서 보면 짧은 시간이다. 삶에서 돌출된, 혹은 푹 꺼져 버린 그 사건은 삶을 관통한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현재와 일치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은 여백이 되고 통제 불가능한 시간으로 삶을 흐른다. 사람들의 여백은 이곳, 사막에서 모여 얽히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과거를 술로 잊고, 누군가는 불태워 버리지만 그들의 삶은 온전히 현재로 돌아올 수가 없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가다 그 기억에 매달려 죽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과장되어 있다. 사랑 때문에 죽는다. 잃고 위태로워진다. 제대로 된 사랑은 이 영화에 없다(홍칠정도가 정상에 가깝다고 해야 하겠다). 왜 그럴까, 다 사랑을 잃고 후회한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못 잊고, 괴로워하고, 사랑을 얻지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간다. 절제된 연기는, 어느 순간 깊이를 그려내기 위해 과잉된다. 그리워하면서, 후회하면서,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랑의 순간을 생각한다. 구양봉은 형수가 된 그녀를 잡지 못해 사막으로 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남 이야긴지 모를 말을 줍고 말하며 살아 간다. 자신의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을 후회하며 다른 이의 후회를 붙잡고 살아간다. 하지만 또 다시 발목을 붙잡히고 만다. 우리는 삶의 여백에서 살 수가 없다. 구양봉은 다시 백타산으로 돌아간다. 


장만옥은 까메오출연이라고 했는데, 짧지만 열연했다. 마지막 장만옥의 오열은 얽힌 실타래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하나로 엮어 내는 감독의 능력도 대단하고.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좋아 한다. 예쁘지만, 가끔 저렇게 무너진 눈빛을 하고 있을 때 난 더 매력을 느낀다. 그녀의 광대 같은 화장은 그녀의 오열로 지워진다. 그리고 곧 죽는다. 그녀가 주었다던 취생몽사. 그렇게 우리는 잊고 싶은 기억 몇 개쯤 가지고 살아간다.



00.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이 반쯤 나갔다. 앉아 있었다.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나가려 일어서 돌아 보니 다들 나이 좀 있는 분들이 앉아 있었다. 예전 학교 다닐 때 다른 학교 사람이랑 술 먹다 이런 얘길한 게 기억났다. 자기가 재개봉한 이명세 감독의 <M>을 보러 갔었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들 나가는데 저 앞쪽에 노부부가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나가지 않고 있더라. 그저 엔딩크레딧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 같진 않더라고. 이명세의 이런 어려운 영화를 보고 노부부가 무엇을 느꼈는지 생각해보게 됐다고. 


관객이 많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스크린에서 눈을 못 떼며 앉아 있던 그 나이 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포함해 그 공간에 있던 모두 다른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난 또 왠지,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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