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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6.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을 것이다


아베 코보가 1924년 생이고 이 작품이 대략 1962년에 출판됐다. 이 시기의 일본 소설은 거의 읽은 게 없지만 이 작품이 꽤 파격적이었을 거란 건 알 수 있다.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 그 당시의 파격이 현대에 와 파격답지 않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카프카의 작품과 유사한 이유에서 여전히 읽을 만한 책이다. 


카프카 작품의 파격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인의 속성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기에 그 지위가 날로 올라가고 있다 할 수 있는데, <모래의 여자>에서도 현대인들의 모습이 상징되어 있다. 읽을 만하다고 느낀 독자가 많았을 텐데, 소설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장면들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긍정 100%, 부정 100% 사이의 관조 

 

얇은 책이지만 이야기거리가 많다. 다 적긴 귀찮고, 카프카스러운 부분만 기록해두려고 한다. 그 남자는 얼탱이 없을만큼 척박하고 말도 안 되는 환경에 놓인다. 남자는 내가 이딴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절규한다. 하지만 남자는 결국 적응한다. 개인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모래라는 자연에 적응하고, 모래로 인해 만들어진 마을의 시스템에 적응한다. 


삶의 행태에 따라 우열을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혹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생존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남자의 삶은 퇴보다. 반면 도시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의 일부로 순응했다라고 본다면 야성을 되찾았다고 긍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부정과 긍정 사이에 사람들의 태도가 놓인다. 100% 긍정도, 100%부정도 아닌 상태다. 


도회적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시스템에 파묻히는 꼴이 도시나 그 모래의 마을이나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어떤 동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100% 긍정 못한다. 그건 결국 또 다른 굴종이라는 의견을 가진 이도 주인공 남자가 갖는 야성, 생존이라는 순수성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요즘 사는 게 너무 쓸데없는 걸로 가득 차있으니까. 구조주의를 믿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일탈의 공간으로서 야성의 공간을 설정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또 100% 부정하기 어정쩡하다. 


남자의 블랙코미디를 보며 대부분의 -현대인-독자는 관조적 자세를 취할 거라 예상한다. 취향에 따라 긍정에 가까울 수도, 부정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딱 부러진 선택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좀 나아 보이게 만들고자 어느 한 편을 선택하면, 그에 내재된 부정성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변명을 위한 모래의 여자


책을 안 봤어도 예상하겠지만, 주인공 남자는 곤충채집을 위해 찾아 갔던 마을에 갇힌다. 책 첫 문단에 이미 그의 실종을 언급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는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결말에서 다시 돌아올까 말까다. 



 옆집에 사는 남자는 젊었을 때 7년 간이나 실종됐었다고 한다. 소문이라서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는 걸 보면 진짜 실종이었을까, 의심이 든다. 

 그와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불과했지만, 어느 날 우연히 말을 나누게 됐고, 그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그의 집은 강박이 있지 않을까 싶을만큼 깨끗했다. 그리고 곤충채집이 취미라서 그런지 이름을 읽기도 힘든 표본이 꽤 많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곤충을 잡는 게 목표라고 했다. 

 간단한 저녁식사 후 자연스레 술을 기울였는데, 적당히 취기가 오른 그가 믿기 어려운 이야길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일 곤충을 찾다 겪은 일이라고. 

  그건 그가 젊었을 때 7년 간 실종 됐을 때의 이야기였다. 

 


​요즘 소설이었다면 대충 이런 도입부를 가지지 않았을까. 괜한 의심에 주인공 남자가 돌아올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지만, 읽을 수록 그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 예감했다. 중요한 건 그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였다. 어느 부분을 넘어가면 그가 결국 살거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주인공은 탈출하지도, 그렇다고 맘 붙이고 살 수 없다는 양극단 사이에서 갈등하다 그냥 적응해버린다. 딱히 관능적이라 여겨지지 않는 '모래의 여자'를 보며, 내가 나가면 저 여자 혼자 힘들텐데. 내 생각은 하지 않을까 등등 구구절절 이핑계 저핑계 만들어 붙이다, 그 여자와 동침해버린다.   


이러한 태도가 앞서 언급한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관조적 태도가 불러올 결말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모래구덩이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아가는 거다. 살다보면 또 살만하다. 주인공 남자는 여자를 임신시키고, 나름의 소소한 재미를 찾기도 한다. 작가가 100% 의도하고 썼을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독자의 태도가 소설속에 정확하게 예측된 것이다. 이 지점이 카프카스럽다라고 말하고 싶은 지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을 것이다. 이걸 왜 적었느냐면, 얼마 전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동사이트들이 일제히 몸을 납짝 낮춘 걸 지지하기 위해 적은 건 아니다. 


과거에 발생했던 문제를 인류는 그럭저럭 해결해왔기 때문에 여전히 생존하고 있다. 아베코보의 <모래의 여자>가, 카프카의 일련의 작품들이 현대사회, 현대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건 당시 내재한 사회 문제가 연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난 해답을 모르기에 '해결됐다'라는 표현을 쓰기 꺼림칙하지만, '문제'가 존재한다는 건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는 있을 거 같다. 


뜻밖의 거창함이지만, '인류는 앞으로도 답을 찾을 수 있을까'란 질문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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