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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6.



안개가 끼면 희끄무레해지는 광경이 주변으로 스며들어 감각이 둔해진다. 도시의 안개는 스모그란 인식 때문에 안개 낀 아침이 주는 기분은 불쾌함이다. 차라리 역설적으로, 안개가 더 짙어질수록 알 수 없는 만족을 느끼곤 한다. 매일매일 가야할 길을 걸음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주고, 그건 낯선 것을 접할 때 느끼는 미묘한 설렘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밤이 길어져 낮의 시공간을 빼앗는 것 같다. 다시 일상의 쳇바퀴로 돌아가야 할 시간에 자기 안으로 숨어들 수 있는 밤이 끼어드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낮의 시간이란 게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무진속으로


주인공은 타의 반 자의 반 무진으로 간다. 사람들은 왜 무진에 살까. 한 해에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여럿인데 그곳에 꽤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역을 대표할만한 특산물도 소득원도 없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상쾌한 낮잠에 취해 가고 있는 곳은 돈 될 게 없지만 사람이 많이 살고 있고, 그래도 뭔가 자랑거릴 뽑으라면 안개를 뽑는 무진이다. 


가끔 좋았던 때를 생각한다. 그게 부끄럽지만, 뭔가에 억매이지 않고 헛되지만 시간과 자신을 썩히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그런 시간을 회상한다. 내가 그랬던 때가 있어, 삶의 궤도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듯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그 순간은 틀에 갇힌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이상향처럼 머리 속에서 아름답게 꾸며진다. 별의미 없는 행위와 말과 거들먹거림과 우울함이 사실 나의 진짜 모습인 것처럼 박제해놓고 안주거리 삼아 술을 마시는 순간이 있다. 술 깨면 다 사라져 버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듯, 무진의 밤과 안개가 걷히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내가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도감이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나를 도피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올 곳이 없다면, 자살한 무진 냇가의 그 여자처럼, 서울로 가고 싶다는 음악 선생처럼 무진은 한 없이 갇힌 공간을 제공하고 말테다. 내가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에 무진의 안개는 특산물이 된다. 네가 돌아갈 곳이 없다면 무진의 안개는 슬픔 밖에 줄 수 없을 것이다. 안개 너머에 있는 세계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향의 재가 떨어지듯, 김승옥은 담뱃재를 털어 망자의 넋을 기린다. 무진에서 죽은 그 여자는 누구일까. 조용히 그녀의 죽음을 지켜준다. 한 시 두 시.... 새벽이 깊어지고 현실을 깨우는 사이렌 소리가 울릴 때 잠이 든다. 다시 현실임을 알리는 소리가 울릴 때 잠을 청하는 행위,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진짜일지도 모른다. 사이렌 소리가 진짜 임을 부정할 수 없기에 잠을 통해 사이렌 소리를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밤에 죽는다. 어쩌면 진짜 시간일지도 모를 때 잠이 든다.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 후 사람들의 진짜 시간이 시작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는 그래서 사이렌이 울린 후 죽고, 사이렌이 사람들을 깨운 후 발견 된다. 죽은 여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제한 당한 통금 시간의 죽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그 시간에 진짜 행위를 만들어 낸다. 주인공은 계속 도망치지만 죽은 여자는 진짜 잠을 찾는다. 주인공은 무진의 안개에서 도망치지만 죽은 여자는 안개 너머로 차분히 걸어 들어간다. 

 


하선생과의 섹스


주인공은 하선생에게 또 다른 안개다. 주인공에게 하선생은 안개다. 하선생의 어떤 갠 날이란 노래는 과거 추억의 어느 순간을 의미할 뿐 현재 그녀에게 별 다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은 성악을 전공한 그녀가 어떤 갠 날이란 멋들어진 곡을 부르지 않고 목포의 눈물 같은 유행가를 부를 것에 의아해하고 동정한다. 인숙은 어떤 갠 날이나 목포의 눈물이나 두 곡이 갖은 의미 따윈 중요하지 않다.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됐다. 자신이 성악을 전공했고,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던지 자신은 무진 어느 학교의 음악선생이고 벗어날 수 없는 '대학 때'란 과거에 사로 잡힌 채, 벗어날 수 없는 무진이란 현실에 얽히고 얽힌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윤희중에게 서울로 날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윤은 고민하다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윤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하지만 인숙은 윤에게 나는 무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대가 나를 데려가지 않을 것임을 안다. 윤에게 무진은 현실이 아니다. 그가 간직하려는, 그는 마치 트라우마처럼 말하지만, 누가 봐도 만족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조건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과거를 간진 한 게 무진이고, 무진의 안개였다. 돈 많고 집 안 빵빵한 과부를 만나 운 좋게 제약회사 전무를 앞 둔 주인공은 그 현실적 조건에 만족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한다.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그런 현실적 조건들이 좋더라는 허울뿐인 변병을 늘어 놓으며 자신을 버리고 간 동거녀를 욕한다. 그것도 사랑이고, 이것도 사랑이라며 자신을 위안하지만 인숙을 자신의 과거로 데려가 몸을 섞는다. 


윤은 그녀를 서울로 꼭 데려 가겠다고 말한다. 너는 나라고 고백한다. 나를 꼭 서울로 데려가라고 말하던 인숙은 이제 나를 무진에 남겨 두라고 말한다. 결국 윤은 인숙을 무진에 남겨 둔다. 이건 뭔가 내가 꿈꾸던 자유와 잠깐의 일탈이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그러나 인숙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섬뜩함 속에서 마지막 용기를 내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외로워하는 자신에게 쓴 편지일 뿐이었지만, 자신에게 쓴 편지마저 찢어버린다. 그리고 무진을 떠나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살아남기


주인공 윤희중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6.25에도 자신을 골방에 숨긴 어머니에 기대 수음이나 하며 오랜 시간을 견뎌낸다. 대학 강의를 듣다 무진으로 수 천리길을 도망와 골방에 숨었다. 대학강의가 시작된 후에도 그 골방에 나올 줄 모른다.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말하는 윤은 언제나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돌아보니 돈 많은 과부와의 결혼은 그에게 많은 걸 안겨줬다. 잊지 못한 과거 동거녀와의 사랑과는 다른 만족을 준다. 인숙을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결심한 그날 아침 아내에게서 온 전보를 받아들고 서늘함을 느낀다. 그리고선 전날 인숙과의 섹스를 한낱 일탈이었다고, 여행지가 주는 자유로움이 일으킨 잠깐의 사고였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같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충에 섞여 있는 소금기, 이 세가지를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 수 있다면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버는 제약 회사 전무님이 될 거라 꿈꾸는 주인공 윤은, 이미 무진에 성공했다고 소문이 자자할만큼의 제약회사 전무 자리를 약속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무 자리를 위해 사랑한다고 말한 인숙을 두고 서울로 상경하는 이다. 집 안 빵빵한 과부와 결혼한 것, 애 하나 갖지 않은 것, 동거녀와 헤어진 것, 잠시 쉬기 위해 무진에 온 것. 윤은 이런 것들을 마치 자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일 뿐이다. 주인공이 굳이 무진을 찾은 건, 자신이 내린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길 바라는 행위에 불과했다. 도망치고 싶어하면서 사실 그는 도망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진의 안개를 그리워하지만 안개가 걷힌 후 다시 제자리를 찾은 무진을 좋아 한다. 나를 버린 동거녀를 그리워하는 듯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제약회사의 과부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그렇게 살아남아 왔고 무진에 와서도 빈틈없는 처세를 즐긴다. 세무서장 조의 거들먹이 역겹지만 그 거들먹거림을 너무 잘 이해하고 받아 준다. 박의 순애보도 알고, 처녀가 아닌 인숙의 바람도 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불가항력처럼 자신을 감싸고 오는 무진의 안개를 대하듯 무감하게, 자신을 향해오는 사건들을 무난하게 받아 들이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윤은 처음 본 인숙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편지를 찢어버린 채.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인 하얀 팻말을 보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이다. 찢어버린 편지에 자신이 자리를 잡으면 너를 꼭 서울로 데려오겠다는 그 거짓말을-물론 그게 진짜 진심일지도 모르지만 절대 인숙을 서울로 데려올 일은 없으리라-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인간이다. 그는 무진에서 손에 꼽힐만큼 성공한 인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무진기행을 읽었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예전에 리얼리즘과 환상문학의 절묘한 결합이라 평했던, 아마도 학창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문구가 기억난다. 교과서나 뭐 이런 건 참 좆같은 거다. 


1960년 대에 쓰여졌음을 믿을 수 없는 이 소설의 작가는 아직도 살아 있다. 한국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이 지나칠 수 없는 이 소설의 저자가 살아 있지만 60~70년 대를 지나며 별 다른 문학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차라리 무진기행의 김승옥으로 기억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50년이 흘렀지만 작금의 소설보다 세련된 국어를 사용하고 도회인을 찬양하는 현대의 소설보다 더 날카로운 성찰을 담고 있다. 그가 이 시기에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 시절의 감수성임을 감안함에 약간은 촌스러운 구석이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 도시의 정수를 포착함에 있어서 지금의 가십거리 소설 한 트럭이 감당해낼 수 없는 감수성과 상징이 담겨 있다. 무진에 가고 싶고, 술을 마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글이다. 오랜 만에 한국소설이라 부를 만한 작품을 읽었다. 무진기행에 대한 논문은 끝도 없이 많을 테니 궁금하면 읽고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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