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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4.



천안함 프로젝트 때문에 관심이 생겨 본 다큐멘터리다. 딱 이 생각이다. 왜 우린 이렇게 못 만들까.


솔직히 천안함 프로젝트 허접했다. 천안함 침몰은 정말 이상한 사건이었고, 내가 잘 찾아 보지 않았음에도 앞뒤 전혀 안 맞는 사건이었다. 천안함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그에 반해 루즈 체인지는 9/11 테러와 관련해 A~Z까지 온갖 의문점을 다 담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천안함 프로젝트의 결말은 '소통이 부재한 사회'였다면, 루즈 체인지는 '9/11테러는 조작이다'란 주장으로 끝났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애초에 빠져 나갈 궁리를 하며 만든 영화다. 피해자와 유족들을 모욕한다는 비판이 두려워서,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이 무서워 얼토당토 않는 식상한 결말로 서둘러 끝내 버린다. 결말의 핀트가 틀렸는데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이 제대로 될리가 없다. 


천안함 사건과 9/11테러는 사건의 크기와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의 크기가 다르다. 9/11테러가 이야기 거리가 더 많다. 작품 내내 영상은 쉬지 않고 넘어가며 온갖 인터뷰 사진, 자료들이 제시된다. 자막을 읽으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영상을 음미할 틈은 없었다. 그렇게 자료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건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너무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한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설명도 천안함 프로젝트에 의문을 제시한 두 명의 유명한 전문가의 입을 통해서 대부분 진행한다. 인터뷰와 자료가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뭐랄까, '책' 읽어 주는 남자처럼, 천안함 사건 읽어 주는 남자랄까. 우리 나라 언론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천안함 프로젝트와 루즈 체인지의 취재력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영상의 구성도 평이했고, 3D 재연도 아마추어적이었다. 할 줄 아는 사람이 할 줄 아는 만큼 만들어 놓은 것 같은 퀄리티정도. 영상은 심심하지 않아야 한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다큐멘터리도, 하물며 TV교양프로그램조차 영상이 단조로워선 안 된다. 영상은 영상이어야 한다. 영상이 단조로우면 사람들의 눈을 놓친다. 대중성이 없더라도 영상이 뛰어나다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천안함 프로젝트는 아니다. 


루즈 체인지에 대해 간단히 찾아보니 1차, 2차 편집본이 있는데, 1차 편집본은 가정용 렙톱 컴퓨터로 2000달러의 예산을 들여 만들었다고 한다. 2차 편집본은 6000달러를 들여 증보판으로 만들었다. 2차 편집본은 미국에서만 약 1억명이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루즈 체인지를 다 보고 나면 9/11 테러가 기획된 사건이었다는 주장에 설득당한다. 반면 천안함 프로젝트를 보고 나서 천안함 사건이 정부에 의해 조작된 결말로 내려졌음을 의심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천안함 프로젝트에서 제시한 내용 만으로도 사실 충분히 천안함 사건의 문제점을 짚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조악한 구성과 영상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있다. 


내가 천안함 프로젝트를 비판하자, 그런 류의 영화의 목적은 프로파간다이기 때문에 성패를 쉽사리 결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한 이가 있었다. 그 사람도 물론 천안함 프로젝트가 '존나' 못 만들었다는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런 식의 퀄리티로 만들어 봤자, 장기적으로 '진실'을 담고자 하는 다른 작품에 부정적 선입견을 갖게 할 것이며, 애초에 천안함 프로젝트를 보는 이는 천안함 프로젝트가 정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 믿는 이들 밖에 없었을 것이다. 루즈 체인지가 1억 명이 봤다 말 할 수 있는 건, 9/11 사건이 테러라고 믿는 이들조차 설득력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만든 루즈 체인지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논란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고, 충분히 공감되는 내용과 구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것이다. 루즈 체인지의 목적도 프로파간다다. 무엇이 더 효과적이겠는가. 단지 만들고 개봉하는 것에 의의를 두는 작품의 한계란 그런 것이다.


루즈 체인지는 재밌다. 9/11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작품이다. 마이클 무어만 좋아 하지 말고, 우리 나라 다큐멘터리들이 참고해야 할 영화는 루즈 체인지가 되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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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키울 것인가, 먹을 것인가. 내가 영화 밖에 있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반 아이들이 몇 년 간 키운 돼지 'P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들은 친구라고, 가족이라고 불렀다. 처음 약속은 P짱을 잡아 먹는 것이었다. 아니, 그 당시 P짱은 그저 돼지일 뿐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이름 붙이길 바라지 않았다. 이름을 붙인 다는 건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란 것을, 그 의미가 어떤 선택의 순간에 괴로움을 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6학년을 마치고 졸업이 가까워 오고 있는 시점에 P짱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후배들에게 물려 주자는 의견과 식육센터에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무엇이 옳은지,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정해지지도 않았다. 영화 속 담임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선택을 내려야 한다. 서로의 의견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지만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 토론하고 토론한다. 아이들은 점점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P짱을 느끼고, 서로를 이해해 간다. 아이들의 사고와 논리는 단편적이지만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의 토론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통계와 전문 지식이 난무하는 그 어떤 토론보다도 진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명의 길이는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답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P짱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 이거 좀 잔인하지 않나란 생각을 했다. 생명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죽음을 예견한 채 정을 들인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으로 다가갈지 상상됐다. 살면서 언젠가 해야할 선택, 이별을 그 어린 나이에 경험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이들의 진심어린 눈물을 보며(비록 영화일지라도), 이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할 하나의 경험이기에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사회는 나이를 구분하고 어린이들, 학생들은 이렇다저렇다 수많은 규칙을 정해 그 안에서 자라도록 만든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미리 예단한다. 보호의 대상이라며, 좋은 것만 봐야 한다며, 아이들 스스로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삶을 제단한다. 영화 속 아이들은 차고 넘칠 만큼 고민하고 사물과 상황을 느낀다. 현실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른들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모범생'을 기준으로 모든 걸 짜맞추며 아이들을 죽이고 있음이다. 잠시나마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더 잔인한 사람이었다.


 


 


00.


원작과 다큐멘터리가 있는 영화. 둘 다 보진 못했지만 영화는 수준 높았다. 무게감 있는 주제지만 전개에 있어 아이들만의 가벼움과 진지함이 영화 한 가운데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설픈 철학도, 눈물 쥐어 짜는 억지드라마도 없었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는, 그래서 어려운, 6학년 2반 아이들을 스크린에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아이들의 눈물이 이해되도록 만든 연출력이 뛰어 났지만, 아이들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이었다. P짱을 놓고 두 개의 의견이 토론을 하던 순간부터 카메라는 토론 장면을 잡을 때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영상으로 화면을 잡았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고 카메라가 거기 있었을 뿐인 듯한 느낌을 주는 영상이었고, 관객이 보다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만든 한 수였다. 클로즈업하고, 슬로우모션 걸고, 있는 울음 없는울음 다 쥐어 짜는 듯한 얼굴을 담아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아이들이 선택하는 것,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 이런 관점이 이 영화를 성공으로 이끈 점이라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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