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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키울 것인가, 먹을 것인가. 내가 영화 밖에 있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반 아이들이 몇 년 간 키운 돼지 'P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들은 친구라고, 가족이라고 불렀다. 처음 약속은 P짱을 잡아 먹는 것이었다. 아니, 그 당시 P짱은 그저 돼지일 뿐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이름 붙이길 바라지 않았다. 이름을 붙인 다는 건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란 것을, 그 의미가 어떤 선택의 순간에 괴로움을 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6학년을 마치고 졸업이 가까워 오고 있는 시점에 P짱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후배들에게 물려 주자는 의견과 식육센터에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무엇이 옳은지,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정해지지도 않았다. 영화 속 담임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선택을 내려야 한다. 서로의 의견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지만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 토론하고 토론한다. 아이들은 점점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P짱을 느끼고, 서로를 이해해 간다. 아이들의 사고와 논리는 단편적이지만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의 토론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통계와 전문 지식이 난무하는 그 어떤 토론보다도 진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명의 길이는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답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P짱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 이거 좀 잔인하지 않나란 생각을 했다. 생명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죽음을 예견한 채 정을 들인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으로 다가갈지 상상됐다. 살면서 언젠가 해야할 선택, 이별을 그 어린 나이에 경험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이들의 진심어린 눈물을 보며(비록 영화일지라도), 이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할 하나의 경험이기에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사회는 나이를 구분하고 어린이들, 학생들은 이렇다저렇다 수많은 규칙을 정해 그 안에서 자라도록 만든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미리 예단한다. 보호의 대상이라며, 좋은 것만 봐야 한다며, 아이들 스스로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삶을 제단한다. 영화 속 아이들은 차고 넘칠 만큼 고민하고 사물과 상황을 느낀다. 현실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른들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모범생'을 기준으로 모든 걸 짜맞추며 아이들을 죽이고 있음이다. 잠시나마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더 잔인한 사람이었다.


 


 


00.


원작과 다큐멘터리가 있는 영화. 둘 다 보진 못했지만 영화는 수준 높았다. 무게감 있는 주제지만 전개에 있어 아이들만의 가벼움과 진지함이 영화 한 가운데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설픈 철학도, 눈물 쥐어 짜는 억지드라마도 없었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는, 그래서 어려운, 6학년 2반 아이들을 스크린에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아이들의 눈물이 이해되도록 만든 연출력이 뛰어 났지만, 아이들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이었다. P짱을 놓고 두 개의 의견이 토론을 하던 순간부터 카메라는 토론 장면을 잡을 때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영상으로 화면을 잡았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고 카메라가 거기 있었을 뿐인 듯한 느낌을 주는 영상이었고, 관객이 보다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만든 한 수였다. 클로즈업하고, 슬로우모션 걸고, 있는 울음 없는울음 다 쥐어 짜는 듯한 얼굴을 담아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아이들이 선택하는 것,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 이런 관점이 이 영화를 성공으로 이끈 점이라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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