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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




제4장 민족말살에 대하여



<서양 문화의 민족말살적 성격> 민족말살의 정신과 실천이 자리 잡는 지평은 두 개의 공리에 따라 규정된다. 첫째는 문화들 사이의 위계이다. 열등한 문화와 우월한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서양 문화의 절대적 우월성이다. 그래서 서양 문화는 다른 문화들, 특히 원시 문화들에 대해서 부정의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부정성은 정립적(positive) 부정성인데, 열등한 것에서 열등성을 제거하여 우월한 것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에게서 인디언성을 제거하여 브라질 시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 집행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말살이란 단순한 파괴의 기도일 수 없고, 오히려 서양 문화의 핵심에 새겨진 인도주의에 의해 요구되는 필수적 임무이다. 72쪽.


<민족말살의 본질>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듯이, 민족말살이란 열등하거나 나쁘다고 판단된 문화적 차이들을 제거하는 것이고, 동일화의 원리,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려는 기도를 실행하는 것이다(아마존 인디언들은 타자라는 면에 있어서는 제거되고 브라질 시민으로서의 동일성으로 환원된다). 달리 말해 민족말살은 다양성을 하나(I'Un)로 해소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국가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구심적 힘의 집행이다. 그 구심적 힘은 상황에 따라 반대의 원심적 힘들을 제거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의 실체의 핵심 속에서 유일자(I'Un)의 능동적 힘, 다양성을 거부하는 성향, 차이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이 형식적 수준에서 우리는 민족말살적 행위와 국가 기계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또 동일한 결과를 생산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76쪽.



-그러니까, 아무래도 클라스트르는 서양 문화와 역사를 배경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클라스트르는 이 책에서 '원시 사회'의 민족지적 사실을 서양 문화, 역사, 지식 등과 병렬적으로 나열하며 비교하고 있는데, 동양 문화는 서양 문화의 타자로 두루뭉술 다뤄지고 있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유일자로 수렴하는 국가 기계의 능동적 작용의 보편성을 동양의 국가 발전에 대입할 수는 있겠으나, 민족말살적 행위의 구체적 사건들은 서양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을 거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서양 문화의 식민지로서도 그렇고, 식민지 이전의 동양 문화, 특히 동아시아의 국가 발생과 문화적 특성은 서양 국가 발전과 그 궤적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클라스트르는 (철학적)소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검증되지 않은 자료나 이론을 철저하게 지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동양 문화에 대해 깊이 다루지 않고 있는듯하다. 



<민족말살적 성격의 이유> 도대체 서양 문명의 어떤 것이 다른 모든 사회에 비해 서양 사회를 무한히 더 민족말살적이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한계 없는 공간으로서, 경계의 부단한 후퇴로서의 장소들 없는 공간으로서, 항구적인 도주의 무한한 공간으로서, 그 경제적 생산 체제이다. 즉 서양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경계 내부에 머무는 것의 불가능성으로서,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통로로서의 자본주의다. 그 자체가 목적이기를 그만두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는 생산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다. 그 자체가 목적이기를 그만두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는 생산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다.

 


-삐에르 클라스트르는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며 탁월한 인류학적 성과를 거두지만, 그의 발견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약간 삐그덕 거린다. 클라스트르는 원시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 경제학적 관점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또한 레비스트르, 그 외 사회학을 기반으로 인류학적 성취를 거두는 이들의 맹점을 비판한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자신의 비판을 답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배경이 되는 학문의 영향력 때문이긴 하겠지만. 클라스트르가 이 부분에서 사용하는 '자본주의'란 용어는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모델로 마르크스가 만든 경제 모델이다. 이제 자본주의를 정치 모델로 상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이긴 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자본주의는 경제모델이다. 원시 부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구사회의 발견은 자본주의의 시대가 아니라, 경제적 모델로 중상주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클라스트르는 현대적 시각으로 원시 사회를 분석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자신은 서구문명을 그가 비판하던 경제적 모델과 그에 내재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입장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왕정, 국가를 강화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원시 사회를 파괴한 근현대 국가의 탐욕 대한 분노는 이해하겠으나 앞서 언급한 '유일자로 수렴되는 국가 기계'에 대한 내용과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연구자의 이론과 자료를 가져와 설명하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안타깝지만 클라스트르가 직접 '자본주의'란 용어를 쓴 것인지 번역과정에서 선택한 것인지 모르겠다. 번역자 중 한 명인 이종영씨의 프로필엔 정치사회학.정치인류학 박사라고 소개됐지만, 정치사회학 박사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그의 번역서를 보니 계급, 계층 간 지배관계에 대한 저서들이 많은데 <폭력의 고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이 여러 장에 걸쳐 부분부분,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변역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유일자로의 수렴'은 국가 단위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의 집단까지 적용이 가능하다. 내가 만났던 이들을 돌아봤을 때, 개인적인 경험 상, 진보 혹은 좌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말한 이들 대부분은 '국가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최근엔 이름만 바뀐 사민주의)를 바라는 이들에게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하지만, 반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같은 개념을 적극 옹호하며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대중들이 동일한 정체성, 신념, 가치를 갖길 바랐고 자본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국가의 기능을 강조했다. 국가가 개인을 통제해선 안 된다 주장하며 말이다. 이런 모순된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민족말살적 태도'를 갖게 되는 아이러니에 대해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제5장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와 의례



<원시사회의 법> 그렇다면 사회의 기반이 되는 법의 근원은 무엇일까? 법은 누구에 의해 공포되는 것일까? 입법자는 과연 누구일까? 앞에서 본 것처럼 토착적 사고에서는 사회와 그 토대 사이의 관계(즉 사회와 그 자체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관계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사회는 자신을 스스로 재생산하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창건하지는 않는다. 특히 전통적인 규칙과 규범에 따르는 사회의 재생산, 즉 사회 자신(soi)의 반복을 확보해 주는 기능이 성인식 의례에 부여된다. 그러나 사회의 창건, 사회의 설립은 전()사회적인 것, 메타사회적인 것에 속한다. 사회의 창건은 인간 시대 이전의 시대에 인간에 앞서 존재했던 존재들의 작품, 조상들의 작품이다. 조상들이 사회를 창건했던 이야기를 다룬 신화는 조상들의 격언, 규범, 법으로서의, 성인식 의례에서 젊은이들에게 전달되는 지식의 총체로서의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 111쪽.


 

-아쉬운 건, 이 책에서도 국가의 탄생, 그 순간에 대한 묘사의 난제를 여러 번 언급하는데 조상이라고 하는 이들, 전(前)사회적 규범의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쌓아둔 민족지적 자료들을 통해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만, 속 시원하게 제시하진 못한다. 생존을 위해서 라면 너무 간단하지 않을까.


 

 


제7장 자유, 재난, 명명될 수 없는 것


 

<자발적 복종> 사실상 라 보에띠는 현대적 인간에 대한, 분화된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인류학의 알려지지 않은 창시자이다. 그는 실추와 소외를 사고하는 니체의 작업-마르크스의 작업보다는-을 이미 3세기를 앞질러 선취한다. 탈자연화된 인간은 실추된 상태에서 존재하는데, 자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외되어 있는데,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로 그런가? 동물들도 또한 복종하지 않는가? 인간의 탈자연화를 동물성으로의 퇴행적 전위(轉位)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사실 때문이다. 즉 인간은 강제나 구속 때문이 아니라, 공포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복종하길 원하기 때문에 복종하고, 예속되길 욕망하기 때문에 예속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탈자연화된 인간이 아직도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인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를, 자유로운 존재이지 않기를 선택하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인간의 새로운 형태이다. 탈자연화되었지만 소외를 선택하기 때문에 아직 자유롭다는 것. 이는 야릇한 종합이고, 사고 불가능한 접수이며, 명명할 수 없는 현실이다. 163쪽.

 


-클라스트르는 라 보띠에의 책 <담화>를 빌려 이 장을 썼는데, 자발적 복종의 이유를 "복종을 하면서 그들에게 고유한 굴복에의 욕망을 실현하기 때문"(175쪽)이라고 적어 놨다. 바로 예속에의 욕망을 실현한다. 탈자연화된 인간이 분화된 사회에 태어났기 때문에 비분화된 사회가 될 수 없으며, "신앙도, 왕도, 법도 없이 사는", "법도 황제도 없이 각자가 자기 자신의 영주인 사람들"(174쪽)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흐름들이 다시 두드러져 그 이유는 뭔지 생각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자발적 복종이란 표현이 거의 모든 걸 함축한다. 우리는 왜 국가에 복종하는가. 태어날 때부터 국가의 울타리에 안에 있던 나 역시 국가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 어렵다. 국가는 마치, 공기처럼 느껴진다.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것. 아주 많은 이들의 과제였기에 다른 이들의 연구를 살펴봐도 좋을 것 같다.


 



제10장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들의 인류학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비판> 달리 말해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를 역사와 사회에 대한 배타적인 과학적 담화로 정립한다. 역사적 운동의 법칙들, 서로를 잇는 사회들의 변형의 법칙들에 대한 담화가 그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형태의 사회에 대해 다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기능 원리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가능하거나 실재하는 모든 유형의 사회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236쪽) ...... 사회적 사실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척도란 무엇인가? 경제가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주의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몸체를 경제적 하부구조 위에 세우고, 사회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바로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적 인류학자들은 원시적인 사회적 몸체에 다른 곳에서 작동하는 것들을 덮어씌운다. 생산, 생산 관계, 생산력 발전, 착취 등의 범주가 그것이다. 아들러가 말했듯이 핀셋으로 찝어 내기다. 그리하여 연장자는 연소자를 착취하고(메이야수) 친족 관계는 생산 관계가 된다(고들리에).(240쪽) ......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원시 사회란 그들이 현학적으로 얘기하듯이 전(前)자본주의적 사회들인 뿐이다. 바로 그것이 수만 년 동안 존재했던 모든 인류 사회의 조직 양식이다.



-국경을 넘어도 마르크스주의는 역시 마르크스주의다. 



<국가 권력과 분화>우리는 국가 없는 권력을 사고할 수 없고, 권력 없는 국가를 사고할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사회의 한 부분이 나머지 부분에 대해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하는 곳에서 우리는 분화된 사회, 즉 국가를 갖춘 사회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의 사회의 분화는 철저하게 정치적이며, 사람들을 권력을 가진 지배자와 권력에의 예속민으로 나눈다. 경제, 공납, 빚, 소외된 노동이 권력의 축에 따른 정치적 분화의 기호이자 효과로 나타난다는 것은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충분히 드러냈다. 원시 사회가 분화되지 않은 것은 정치 권력의 분리된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 분화는 우선 사회와 권력의 [?] 기관 사이의 분화를 거친다. 따라서 원시적이지 않은 (즉 분화된) 모든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갖지만 국가의 형상을 내포한다. 236쪽.


 

 


제11장 폭력의 고고학 : 원시 사회들에서의 전쟁

  


<원시 경제의 빈곤> 원시 경제는 빈곤의 경제일까? 원시 경제의 생산력은 가장 저발전한 것일까? 최근의 매우 세심한 경제 인류학적 연구들은 “야만인들”의 경제 또는 가구적 생산양식이 실제로는 사회의 물질적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음을 드러내준다. 그것도 매우 짧은 노동 시간과 매우 낮은 노동 강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바로 그래서 마샬 살린스는 원시 사회가 최초의 풍족한 사회라고 정당하게 말했던 것이다. 한 공동체에 필요한 식량과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노동 시간에 대한 살린스와 리조의 분석은, 유목 수렵민 사회이건 정주 농경민 사회이건 원시 사회는 그 짧은 생산 시간을 감안할 때 진정으로 여가의 사회임을 드러내준다.(261-262쪽)


-물질적 결핍에 시달린다거나 식량을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주장을 비판.

 


<원시 사회의 총체성과 통일성> 원시 공동체는 총체성이자 통일성이라는 속성을 동시에 갖는다. 원시 공동체가 총체성인 것은, 완결되고 자율적이며 완전한 합체, 자신의 자율성을 부단히 유지하려는 합체, 완전한 의미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또 통일체인 것은, 사회의 분화를 거부하면서, 불평등을 배제하면서, 소외를 금지하면서 동질적 존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원시 사회는 그 통일성의 원리가 외재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하나의 총체성을 이룬다. 즉 원시 사회는 사회적 몸체로부터 분리된 어떤 일자(一者, I’Un)의 형상이 사회를 대표하고 또 사회의 통합성을 구현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비분화라는 기준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275쪽.


-원시 사회의 총체성과 통일성을 잘 구분하지 않으면, 모순돼 보이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원시 사회의 전쟁과 교환> 레비스트로스는 원시 사회의 존재가 교환을-위한-존재라고 믿으면서, 원시 사회가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즉 전쟁은 결여된 교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담화는 민족학적으로 읽혀질 수 있는 원시 사회의 사회학적 현실에 모순된다. 우선하는 것은 교환이 아니라, 원시 사회의 작동 양식에 기입되어 있는 전쟁이다....... 전쟁은 동맹을 내포하고, 동맹은 교환을 도출시킨다. 우리가 교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전쟁은 교환의 우발적 실패의 귀결이 아니다. 오히려 교환이 전쟁의 전략적 결과이다. 287쪽.



<원시 사회의 전쟁, 그 이유> 스스로를 하나의 “우리”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는 분화되지 않고(하나) 독립적(총체성)이어야 한다. 서로 결합된 내적 비분화와 외적 대립은 서로의 조건을 이룬다. 그리하여 전쟁이 멈추면 원시 사회의 심장이 고동치길 멈춘다. 전쟁은 원시 사회의 토대이고 그 존재의 삶 자체이며 목적이다. 즉 원시 사회는 전쟁을 위한 사회이고, 본질적으로 전쟁적이다. (각주:전사로서의 원시인들에 대한 서양인들의 담화가 아니라, 같은 논리를 갖는, 그러나 전혀 예견되지 못한 잉카인들의 담화를 지적해 두자. 잉카족은 제국의 행보를 교란시키는 부족들을 지칭하여 부단한 전쟁 상태에 있는 야만인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부족들을 통합하려는 ‘팍스 잉카나’의 정복 시도는 정당화된다.) 292쪽.



<전쟁과 국가> 홉스에게 있어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유대란 오로지 “모두에게 경외심을 갖게 하는 공통의 권력” 덕분에 가능해진다. 즉 국가는 전쟁에 대항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구적 전쟁의 사회학적 공간으로서의 원시 사회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원시 사회는 홉스의 말을 뒤집어서 반복한다. 즉 분산의 기계는 통합화 기계에 대항해서 작동한다는 것, 전쟁은 국가에 대항한다는 것이다. 297쪽.


 



제12장 야만적 전사의 불행



<카노클레의 죽음> 수많은 상처(백병전, 화살, 총알로 인한 상처들)로 뒤덮인 타누는 거의 틀림없이 십여 명 또는 이십여 명의 적을 죽였다. 나는 물었다. “왜 카노클레가 되지 않았나요? 왜 적들의 머리가죽을 벗기지 않았나요?” 그의 모호한 대답은 거의 코믹했다. “그건 너무 위험해. 나는 죽고 싶지 않았어.” 거의 십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자가 죽는 것이 무서워 전사가 되길 거부했던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사회와 전사들의 관계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히 분석할 순 없다. 부족은 자기 내부에 전사들의 자율적 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용인한다. 부족은 관대하게 그들의 위세를 인정해 주면서 전사들의 역할을 지원한다. 이 위세 집단은 압력 집단이 되고, 더 나아가 권력 집단이 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전사는 충분한 시간을 갖기 못한다. 그가 전사이기를 포기하면서 체면을 잃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한에서, 그는 자신의 사명의 함정에 빠지고 영예에 대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곧장 죽음으로 향하게 된다. 343-344쪽.



<전사에 대항하는 사회> “야만적” 전사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결코 없고 오직 불행의 확실성만이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왜냐하면 전사는 분화의 씨앗을 가져다주면서, 권력의 분리된 기관이 되면서, 사회에 불행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시 사회는 전사가 담지하고 있는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방어 메커니즘을 설치한다. 비분화된 사회적 몸체의 생명을 전사의 죽음과 교환하는 것이다....... 원시 사회는 그 존재에 있어서 전쟁을 위한 사회이지만, 동시에, 동일한 이유에서, 전사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345쪽


-클라스트르는 비분화된 사회를 지키기 위한 원시 사회의 메커니즘을 전쟁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원시 사회에서의 남성과 여성>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원시 사회의 현실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빈약한 교리문답의 옹색한 제작자인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의 주창자들은 원시 사회에서 계급 투쟁을 찾아 낼 수 없자 그것을 대신할 사회적 갈등으로 여성들이 패배자가 되는 성적 투쟁을 찾아낸다. 원시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소외되고 착취되며 억압받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경건한 신조에 야릇하게도 특정한 페미니스트 담화들이 상응한다. 345쪽.


...... 즉 전사로서의 남자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고, 어머니로서의 여자는 생명을 향한 존재이다. 남녀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남녀 각각의 관계이다. 부족의 집합적 무의식(문화) 속에서 남성 무의식은 성적 차이를 남성에 대한 여성의 뒤집힐 수 없는 우월성으로 파악하고 인정한다. 죽음의 노예인 남자들은 생명의 지배자인 여성들을 부러워하고 두려워한다.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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