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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이 책은 읽고, 쓰고, 다시 읽고 고쳐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읽는 다는 것은 목숨과도 같은 일, 미친 일이다. 읽는다면, 읽었다면 읽은대로 살 수밖에 없다. 읽었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 책은 말한다. 책 읽기를 멈춰야 할 때가 얼마나 읽었는지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할 때란다. 무엇을 읽었는지, 얼마나 읽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읽었는가'가 중요하다.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 16세기 루터 혁명을 상세히 다루며 혁명의 본질은 읽고 쓰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유스티아누스의 법전이 '발견'되고, 이후 100년동안 로마법에 따라 당시 교회법이 다시 쓰이며 혁명이 일어난다. 루터 역시 성경을 다시 읽고 독일어로 옮기며 '법치국가'의 원형을 만든다. 사사키 아타루는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이지 폭력은 이 혁명의 부차적 행위일 뿐 본질이란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에 의해 근대, 현대의 국가관과 정보통신기술의 원리, 실증주의, 자본주의의 모체, 정보-폭력-주권이라는 틀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다시 해야 한다, 문학을 다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예술과 문학은 한 번도 멈추거나 사라진 적이 없으므로, 읽고 쓰라고 말한다. 


사사키 아타루는 라캉을 주요하게 인용하며 나치, 일본의 옴진리교는 세계 전체의 이순간의 멸망을 원하는 '절대적 향락'일 뿐이라며 일축한다. 지금 이 시대가 역사의 특정한 한 순간이라는 인식은 다른 의미에서 도 다른 '종말론'일뿐 역사는 흐른다, 시각과 끝은 무한히 반복됨을 강조했다. 또 푸코는 근현대 사회의 규범례/규율들은 -교육, 병원, 관료제, 예의범절, 공장시스템 등등- 통치의 기술일뿐, 누군가, 혹은 국가에 의해 신체에 기록되고 반복되고 인간들을 기계로 만들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인 듯,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으로 인해 발명된 개념인 정보-폭력-주권에 의해 인간들이 규정 당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잘못된 인식, 나쁜 원리주의, 삐뚤어진 신앙, 가치 없는 정보들에 둘러 쌓여 사는 현대인들은 결국, 또 다른 세계를 잉태하고 더 나은, 혹은 더 나아질 세계를 위해 혁명을 하라고 말한다. 


최근 책 읽기와 글쓰기에 게을러한 나에게 좋은 책이었다. 사실, 이 책에 담긴 다양한 지식과 논리가 좋긴 했지만, 읽어야 한다는 명제만이 책을 다 읽은 후 나에게 남는 것 같다. '비평가'와 '전문가'의 비유, 읽기의 양과 질, 예술의 보편성 등을 깊게 다루진 않았지만 충분히 공감할만큼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책은 천천히 읽고, 이해하며 읽었다. 사족이지만 애지중지하며 읽었다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책을 집중헤서 읽었다는 말이다. 그가 쓴 야전과 평화를 읽는다면 이책을 더 유용하게 읽을 수 있을까 싶지만 우리나라엔 번역되지 않았다. 이럴 때 나의 한심함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100만부 넘게 팔렸다니,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번역이 되지 않을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읽기과 쓰기는 꾸준함뿐이다, 매일 속으로 되내이는 이 말을 다시 꺼내 또 되뇐다.


이 책의 대부분은 르장드르라는 사람의 연구를 빌려온 듯 싶으나, 어쨌든 세계를 독특한 시각으로 보는 책이 좋다. 내가 모르는 시각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지도. 암튼, 화석이 된 이야기를 성경처럼 껴안고 떠받치는 이들이 주위에 많아서 그런 가 싶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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