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150424.



1. 위협받는 사랑


'미틱'이라는 프랑스 만남 알선 사이트 얘기로 시작한다. 이 책은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알랭 바디우와 니콜 트뤼옹의 공개 대담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미틱의 '위험 없는 사랑'을 "언젠가 미군이 '전사자 제로' 전쟁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었다던 그 프로파간다"와 상당히 닮았다 지적하고 있다. 위험, 위협이 없다는 것은 모든 상황이 예측 가능하며 또 그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암시다. 이를 통해 사랑은 일반화되고 "보험 계약서의 안전"과 "제한된 쾌락이 가져다주는 안락"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위해, 아르튀르 랭보의 말을 인용해,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 철학자들과 사랑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반(反)사랑"과 쇠렌 키르케고르(=키에르키고르)의 사랑론(심미적 단계-윤리적 단계-종교적 단계)을 언급하며 철학에서 사랑을 다루는 두 가지 극단점이며 대부분 사랑에 대한 논의가 이 두가지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또 플라톤을 언급하며 사랑의 보편성과 라캉을 언급하며 섹슈얼리티의 허구성과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아주 간략히 언급하며 이 장의 뒷부분에선 자신의 사랑론을 설명하는데 이는 본문을 그대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사랑에 드리워진 철학적 개념들에서 세 가지 원칙을 구별해내야 하겟습니다. 우선 낭만적 개념인데, 이것은 만남의 황홀로 집약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앞에서 우리가 만남 알선 사이트 '미틱'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을 때 더러 언급되었던 것인데, 사랑을 최종적으로 하나의 계약으로 여기게 될, 상업적이고 법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개념입니다. 여기서 계약은 서로 사라한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관계의 동등성, 상호이익이 동반되는 시스템 등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자유로운 도 개인 사이의 계약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회의적인 개념도 또한 존재합니다.



   제 고유의 철학에 의거해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은 이러한 시도들 가운데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은, 예컨데 진리의 구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성생님은 그럼 무엇에 대한 진리냐고 저에게 되물어보실 수 있겠지요. 당연히 그것은 아주 특이한 의견에 관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적 욕망과 그 시련들, 또는 아이이 탄생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타의 것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 사랑의 구축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의 반대를 뚫고 사랑을 완성한다. 이는 아주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다. 어떤 형태의 사랑의 완성을,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저자는 "급진적이고 낭만적인 사랑 개념"이라며, 이러한 개념에 "예술적 매력이 존재하지만 심각한 실존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거부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밝힌다. 바디우에게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사랑은 "경험"이 아니라 "구축"인 것이다. 저자는 특히 사랑 개념을 섹스가 실체라 주장하는 회의주의적 전통에 반대한다. 사랑과 우정의 차이는 이 육체적 관계를 포함함으로써 나타나지만 육체적 관계는 사랑이 "타인이라는 존재의 총체성"이기 때문에 그 일부에 불과하다. 육체라는 물질적 담보까지 포괄하는 것이 사랑이다.  


 


4. 사랑의 진리


바디우는 사랑이 (자신의 고유한 개념을 빌려)"진리의 절차"이며,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표현하는 무엇"이라 말한다. 그는 사랑이 진리를 향해가는, 혹은 진리의 탐구를 내포하고 있는 핵심적 행위라고 여러 차례 주장한다. '둘이 등장하는 무대'란 사랑의 두 주체가 차이를 인식하고 여러 지점들을 거쳐 사랑을 구축해가는 행위를 가르키는 표현이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이 차이는 곧 진리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차이는 가까워질 수 없는 주체 간의 거리를 의미하지 않고 이 차이의 의미를 존중하고 유지할 때 비로소 사랑의 지속이 가능하다. 또 '무대'라는 표현엔 "우연을 고정"시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러 작품에서 사랑의 완성된 지점이라 표현하는 그 순간, 두 주체가 처음 '만난'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최초 "선언"한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며 사랑의 두 주체가 무대에 등장해 사랑을 연속해 가는 것이다. 사랑을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점들이 존재-이를 테면 아이를 낳거나 시련 등-하고 이 지점들을 "동일성"으로 수렴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이른바 진리의 절차라 할 수 있다. 라캉, 회의적 모럴리스트 시각처럼 결국 두 주체이지만 각 주체는 각 자 사랑을 생각하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디우는 단호히 사랑은 둘이 등장하는 무대에서만 가능하다 이야기한다.


 


5. 사랑과 정치


정치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진리의 절차이며, "사랑의 관리를 사회화하기 위해 사랑의 지평에 가족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열망을 억누르기 위해 정치의 지평에는 권력, 즉 국가가 존재"한다. 사랑과 정치는 매 지점을 통과하는 것이기에 정치->권력, 사랑->종의 재생산이 목적이 될 수 없다. 지점, 선언, 충실성이 존재하지만 정치는 '적'의 존재유무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밝히는 과정이 중요하기에 사랑과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에서의 적은 외재적 요소지만 사랑은 둘이 등장하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내재적 요소들이 주를 이룬다.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이겠습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는 "자아"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기독교-종교적 사랑 역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기독교적 사랑은 사랑의 내재적인 보편적 요소를 어떤 초월적인 하나의 힘에 결부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현실에 사랑의 보편적인 힘이 정말로 존재하긴 하지만, 이 힘이란 아주 간단하게, 우리에게서 차이에 관한 긍정적이고 확정적이며 창조적인 경험을 만들어내게 될 가능성"이다. 타자는 분명 존재하지만, "'전체-타자'(Tout-Autre)나 초월성의 '대타자'(Grand Autre)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정치적 열정과 뒤섞지는 말아야" 하지만, 코뮤니즘이라는 단어에는 사랑 결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코뮤니스트적 사유, 사적 소유의 욕구에 지배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사유, 자유로운 결사와 평등의 세계에 대한 사유의 부활"이라는 점이,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떠나 사랑의 가치는 오로지 그 자신 속에 머무르며 두 개인의 즉각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6. 사랑과 예술


예술은 사건의 순간을 붙잡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예술과 사랑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술은 사랑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비언어적, "비사회적인 특성을 빈번히 대변"해왔다. "사랑에 관한 사유, 그것은 모든 질서에, 법질서의 힘에 대항하여 만들어지는 사유"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제 모든 형식 속에 사건 그 자체를 담아내는 위대한 사유"인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대부분 만남의 순간, 일종의 사랑이 완성되는 듯한 순간을 포착한다.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중요한 요소는 지속성, 충실성이다. 질문자는 베케트의 연극을 자주 인용하는 이유를 묻는데, 베케트는 사랑의 아름다움 모습뿐만 아니라 사랑이 지니는 시간의 모습을 그대로 포착해 작품에 담기 때문이라 답한다. 참담함, 괴로움, 단로조움, 지루함 등과 같은 지점(혹은 시련)을 거쳐 유지되는 사랑의 긍정적인 끈질김을 담아 내는 작품은 많지 않다. 


바디우는 대담에서 연극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드러내며 예술과 사랑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연극은 단지 언어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언어-비언어', 특히 육체적 몸짓까지 포괄하여 총체적인 완결성을 지니게 된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그 순간 선언으로서 반복되며, 집단적, 박애의 미적 형태, 코뮤니스트적인 무엇이 내재되어 있다. 연극은 "몸으로 이루어진 사유"라 표현하며, 포르투갈 시인 페소아(Pessoa)의 말을 빌려- "사랑 (역시) 하나의 사유다"라고 말한다.


 


00. 


얼마전 웹툰 '고삼이 집나갔다'를 봤다. 갖은 고난 끝에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 격인 여캐릭터와 '사랑'에 성공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를 간략히 그리는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은 그 여자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 사실도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의 친구 입에서, 헤어졌단 사실을 알리기 위한 용도의 대사를 통해 언급했을 뿐이다. 마치, 시간이 흘렸으니 헤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이런 뉘앙스랄까.


대부분 사랑 얘기는 사랑이 완성되는 어느 시점에 관한 얘기다. 연인이 되거나 혹은 결혼을 하거나 그런 경우 말이다. 외재적 위협 요소를 사랑으로 극복하는 스토리는 굳이 로맨스 영화가 아니더라도 많이 접할 수 있다. 이야기는 사랑이 완성된 시점에서 끝을 맺으며 우리는 사랑은 역시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며 작품과 함께 생각을 멈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영원처럼 지속된다. 삶은 죽음이 끝이다. 미묘한 이질감을 숨기고 사랑을 다룬 예술 작품의 끝과 우리 삶에서의 사랑의 끝과 동치시키려 한다, 혹은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예술 작품의 끝처럼 완성된 사랑의 순간이라고 여기고자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사랑의 환상과 착각에 의문을 표하며 저자의 철학관을 사랑이란 주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사랑에 드리워진 철학적 개념들에서 세 가지 원칙을 구별해내야 하겟습니다. 우선 낭만적 개념인데, 이것은 만남의 황홀로 집약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앞에서 우리가 만남 알선 사이트 '미틱'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을 때 더러 언급되었던 것인데, 사랑을 최종적으로 하나의 계약으로 여기게 될, 상업적이고 법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개념입니다. 여기서 계약은 서로 사라한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관계의 동등성, 상호이익이 동반되는 시스템 등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자유로운 도 개인 사이의 계약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회의적인 개념도 또한 존재합니다.


   제 고유의 철학에 의거해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은 이러한 시도들 가운데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은, 예컨데 진리의 구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성생님은 그럼 무엇에 대한 진리냐고 저에게 되물어보실 수 있겠지요. 당연히 그것은 아주 특이한 의견에 관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적 욕망과 그 시련들, 또는 아이이 탄생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타의 것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내 주변에서 부러워할만한 연애를 하는 이가 거의 없는데, 바디우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둘이 하나가 되려하거나 외재적 요소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 서로의 관계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흔히 속박이라 표현하는 행위로 연인 관계에 나타나며, 후자는 '기념일'로 상징되는 '의무'에서 찾을 수 있다. 바디우는 '둘이 무대에 오른다'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두 주체의 '총체적 삶'이 맞아가는 과정이란 표현을 쓴다. 화학적 작용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확인하여 일종의 블럭처럼 완성된 형태를 갖춰가는 것이다. 전체 형태는 블럭의 모양과 조립에 따라 시시각각 그 모양을 달리한다. 두 명이 가지고 있는 블럭을 서로 꺼내놓고 조립해 어떤 형태를 만들어 가는 장면으로 묘사해도 좋을 것 같다. 둘-차이, 지속성-충실성, 사랑의 총체성 등 대부분의 개념이 나의 관점과 유사했다. 사랑은 순간이 아니고, 위험하며 고통스럽다. 이를 배제하고 사랑은 성립할 수 없다.



요즘 연애는 쉽지 않기도 하지만, 쉽기도 하다. 만나고 헤어짐의 고통은 여전하겠지만 바디우가 강조한 지속성-충실성에 대한 노력이 우습게 다뤄지고 있다. 그가 비판한 회의적 모럴리스트의 관점이 더욱 현대적이고 세련된 인식으로 받아들여져 사랑에 어떤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는 행위를 종교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바라보는 분위기가 만연해있다.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 사랑이 깨져버리는 반복이 되풀이되고 최초의 (사랑)선언은 반복돼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사회적으로 별 의미없는 수사로 다뤄진다. 연애와 사랑을 구별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며 사랑을 주장하는 이를 모두 비웃는 사회에서 누가 사랑에 대해 사유하겠는가.


바디유는 사랑이 하나의 사유라고 말한다. 총체적인 사유다. 즉각적이지 않으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지점을 예비하고 차이를 통해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고 괴로운 일이다. '미틱'이 제시하는 사랑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여기 우리 삶 속에도 깊이 자리하고 있다. 결혼을 계약으로 다루는 관점은 실체가 됐고(결혼해 듀오, 국제 원정혼 등), 특히 결혼을 문화적,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이들일수록 결혼을 종의 번식과 질서유지를 위한 제도로 받아들여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쿨하게, 심플하게 결혼은 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것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 중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는 이 하나 찾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육체적 관계, 연애-데이트 수준의 교감을 원한다. '사랑'(=연애 혹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될 외재적 이유를 수십가지를 만들어 놓고 자신을 방어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들에게서 내적 공허함을 느끼지 못한 경우가 없다. 사랑을 사유하지 못하고, 사랑에 대한 개념조차 없기 때문에 내적 욕망을 육체적 욕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육체적 욕망은 본능적인 것이므로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배우지 않아도 습득-경험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할 수 있는만큼 사랑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이 모순을 불러 일으킨다. 고독하고 슬픈 장면이다. 차이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이별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사랑에 둘이 필요함을, 두 개의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나'라는 주체조차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둘의 차이를 낯설어 하는 것이다. 본능에 충실한 욕망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구조-시스템이 견고해지고 개인의 사유를 필요치 아니한다. 모든 건 구조에 대한 문제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바디유는 사랑과 정치의 차이는 둘의 문제냐 공동체의 문제냐로 구분 지을 수 있다 했다. 이젠 사랑마저도 정치로 환원되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이 사라진 사회는 황폐할 뿐이다. '사랑은 진리를 구축하는 과정이다'라는 바디유의 주장을, 지금으로선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