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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1.



 그들은 사회의 존재성을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공급해주는 곳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서로뿐이었고, 또 그것으로 그들은 충분했다. _175


 끝내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그 대상으로 삼으려 노렸했다. 서로를 껴안고 둥근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활은 쓸쓸한 대로 안정되어 갔다. 그 쓸쓸한 안정 속에서 일종의 달콤한 비애도 맛보았다. 문학이나 철학과는 인연이 없던 그들은, 그 맛을 다 본 다음에도 자신들의 상황을 만족해하고 자각할 만한 지식을 지니질 못했기 때문에 같은 처지에 있는 시인이나 문인들보다 한결 순수했다. _220



 소스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언제나 내 속에 있다. 그래서 문을 항상 기억하며 산다. 대학시절 사랑에 한참 시달릴 때 이 책을 읽게 됐다. 소스케처럼 둘의 세계에서 살고 싶었다.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그 의미를 잃어 갔고, 오직 사랑의 대상만이 존재했다. 나에게 아무것도 자극이 되질 않았고, 어떤 대화도 맛이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나의 세계에 존재했다. 그런 시간이 흘렀고, 나는 많은 것들을 잃어 버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소스케처럼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나의 세계에 홀로 남겨질 때쯤 마음을 다시 읽었다. 그 때 처음으로 책의 모든 문장을 이해하는 경험을 했다. 놀라웠고,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예고도, 준비도 없었기에 그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더욱 힘들어졌다. 소세키의 담담하고 평이한 문장 뒤에는 사람을 상처낼 만한 통찰이 벼려 있었다. 마음을 버리지도 다시 읽지도 못한 채 책장에 넣어 두었다. 그녀에게도 말했지만 그건 더 이상 내 책이 아니었다. 마치 탈색돼 버려 더 이상 아무런 색깔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산시로로 시작하는 3부작을 아우르는 작품으로 읽히기에 담겨 있는 내용이 제법 길다면 길수도 있다. 시간적 배경도 그렇다. 하지만 문은 단지 쓸쓸할 뿐이다. 그때 문을 기억하는 순간에도, 다시 읽은 지금도 쓸쓸하다는 말 외에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다. 그 시절 정립되지 않은 순수함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의 쓸쓸함과 지금의 쓸쓸함은 다르다. 소스케의 모습에 나를 투영하려 했다면, 지금은 문의 문장을 담담하게 읽을 수 있게 됐다. 나는 나의 직설적인 감정으로부터 회피하는 법을 점점 능숙하게 익혀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무 목적도 없이 방 안에서 일어섰다.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문 앞에서 뱅뱅 돌며 뛰고 싶었다. 밤은 조용히 깊어만 갔다. 자고 있는 사람이건 깨어 있는 사람이건 그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소스케는 밖으로 나갈 용기를 잃었다. 가만히 숨만 쉬면서 망상에 시달리는 것은 더욱 무서웠다. _244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심리적 방어기제의 유형이 나타나는데 나의 주된 방어기제는 '회피'다. 사회의 기준에 따라 만들어야 하는 사건과 관계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녀를 잃고 난 후 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것이 탈색 돼버린 듯했다. 하지만 살아야 했고,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압박을 피하기 위해 살아 왔다. 갈 곳 없는 발길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깨달았다. 멈춘 시계가 다시 흐르고 있다 생각했지만,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나를 데려왔다.


 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소스케를 그린다. 그는 무엇인가 하려 했다가도,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가도 그대로 주저 앉아 무탈하게 시간이 지나가길 바란다. 사실, 무엇을 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지만 해야할 이유 따위를 찾지 못한다. 그에게 목적은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을 언제나 경계하고 불편해 한다. 언제나 도망칠 준비가 돼있다. 야스이가 나타나려 하자 핑계를 대고 도망쳐 버린다. 하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소스케도 알고 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하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올"거란 사실을.



 그 두 사람은 세상에서 보면 분명 두 사람이었으나, 서로가 볼 때는 도의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두 사람의 신경을 이루고 있는 신경계는 마지막 섬유질에 이르기가지 서로 부둥켜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_176



 소스케는 겨울을 피하려 모른 채하고 도망치지만 다시 돌아온다. 오요네가 있기 때문이다. 오요네와 나누는 몇 마디의 대화, 금실 좋은 부부의 대화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짧막한 몇 마디의 말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거리에서 떨어져 찾아 오는 이 없는 절벽 밑 집에서 둘만의 공간을 만들고 소박하게 지낸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서로에게 종교이고 목적이다. 아니, 그런 거창한 수식은 필요치 않아 보인다. 문에는 그런 거창한 수식 따윈 전혀 없다. 그 둘은 황량함이 느껴질 정도의 공간에서 하나가 되어 산다. '물 위에 떨어진 두 방울의 기름이 한 방울이 돼, 이제는 하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둘이다. 그래서 그 둘에게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다. 서로에게 존재가 된다. 


 거대한 운명이 장난처럼 그 둘을 세상에서 떼어 내고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과거의 인과에 따라 운명을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산다. 마음의 K는 일찍이 자살을 택한다. 그 황량한 공간에 혼자 남겨지기 때문이다. 마음의 선생 역시 나이가 들어 자살한다. 둘이라 생각했지만, 인간은 결국 혼자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선생은 오랜 시간 방 안에서 나오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오요네'에게 미안함을 말한다. 그의 죽음은 K를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지지만 소설로서의 상징성이 크다. 혼자이고 종국엔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 게 인간이지만, 선생은 하나라고 여기는 대상이 있기에 삶을 연장할 수 있었다. 알랭 바디우도 하나가 될 수 없는 '둘의 무대'가 사랑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 무대의 막이 내려오지 않도록 연장시키는게 삶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00.


 그는 오래도록 문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가는 건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데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_264


 서럽게 쓸쓸한 표현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소스케처럼 살고 싶단 생각을 한다. 

 문하면 모두 여길 찍는다. 그래서 왠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란 생각이 들어 싫다. 공유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어제 어렴풋 동틀 무렵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 책상 위에 꺼내놓은 이 책을 읽었다. 읽으려 책장에서 꺼내 몇 페이지 읽고 덮어 두길 한 두 주가 지났다. 내 주변에 몇 권의 책이 그렇게 쌓여 있다. 다시 책을 읽을 때가 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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