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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31.




이렇게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있을까.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읽었다. 몇 장 읽고 덮고를 반복했는데, 그 몇 장마다 모두 슬픔과 인생이 담겨 있었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냥 아픈게 아니라 많이도 아파왔다. 소설이지만, 소설에 쓰인 고통들을 보며 내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부끄러웠다. 

 

사랑해야 한다. 더 필요한 말은 없다.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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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7.



에밀 아자르의 가면의 생을 보고, 뭔 말인지 못 알아 먹어 에밀 아자르의 책을 순서대로 읽고자 마음 먹었다. 그 첫 번 째 책이다. 아, 가면의 생에서 주인공이 왜 자꾸 무엇인가로 변하려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알려진 대로,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로칼랭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을 처음 쓴 작품이었는데, 다 쓰고 나서야 로맹 가리 이름을 걸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고 한다. 


 로맹 가리가 썼다는 걸 알아서 그랬는지 결말 전까지는 얼추 비슷한 주제의식과 문체란 생각이 들었지만, 결말이 가까워 올수록 에밀 아자라의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구입한 책에는 초판 당시의 결말과 로맹 가리가 원고를 완성했을 때의 결말 두 가지가 들어 있다.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가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을 때 편집인은 결말 부분을 삭제하자고 했단다. 로맹 가리는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 들인다. 추후 기회가 되면 공개하겠다 했는데, 초판에서 삭제된 결말을 '생태학적 결말'이라 부른다.  


 번역서이긴 하나, 톤이 약간 달라지고 결말이 좀 그로테스크하게 나오자 과감하게 자르자고 한 것 같다. 하지만 로맹 가리가 아니라 에밀 아자르의 작품이라고 한다며, 그 '생태학적 결말'이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가 태동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 쿠쟁은 인간적인 애정과 고독,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건 그에게 자연적인 행위지만. 그의 회사 사환에겐 반자연적인 행위이다. '바스티유에서 코뮌까지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길 위의 일, 밖의 일이다. 쿠쟁에게 중요한 건 바스티유에서 코뮌까지의 3킬로미터가 아니라 그로칼랭의 이미터 이십 센티미터이다. 쿠쟁은 68 당시 무서워 집 밖으로 3주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로칼랭은 스스로 탈피한다. 하지만 사환은 그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장 물랭과 브로솔로트를 숨기고 있는 쿠쟁은, 그로칼랭이 바로 이사회의 레지스탕스적 존재임을 알고 있으며, 그로칼랭의 반점이 세계의 독자적인 정체성의 상징임을 알고 있다.


 자연적인 것이 비자연적인 것이 된 세계, 비자연적인 게 자연적이 된 세계에서 쿠쟁은 스스로 그로칼랭이 된다. 지금은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있지만 가면의 생에서 이 문제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룬다. 그 때 더 다루는 게 좋을 것 같다. 


 


 "가엾은 우리 자리."


 나는 그게 좋다. 누가 가엾은 생쥐...... 아니, 자기라고 불러주는 것이 좋다. 내 존재를 증명하는 느낌이 든다. (프랑스어로 생쥐는 수리, 자기는 셰리이다) 59쪽


-쿠쟁은 그로칼랭이 생쥐를 먹는 걸 참지 못한다. 생쥐-자신은 그로칼랭에게 먹혀야 할 지상의 양식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상의 양식 문제에 대해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 쿠쟁은 최초 그로칼랭에게 먹이로 주기 위해 사온 조그만 쥐에게 애정을 느껴 블롱딘이라 이름 붙혀 키운다. 그로칼랭에게 먹히는 걸 막기 위해 따로 집을 만들어 그로칼랭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올려 둔다. 나중에 그로칼랭은 블롱딘을 먹지 않고 함께 평화로이 지내는 사이가 된다.



 내가 불안하고 불행할수록 그로칼랭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로칼랭은 그것을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몸을 늘여 나를 감아주지만, 때로는 그것도 부족해서 몇 미터, 또 몇 미터가 더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애정 때문이다. 애정은 내부에 구멍을 파고 자기 자리를 만들어놓지만, 막상 거기에 애정이 없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고 이유를 찾게 된다. 62쪽.


 


 서장이 되물었다. "그로칼랭이라니요?


 "내 비단뱀 이름입니다." 70쪽.


-그로칼랭은 열렬한 포옹이란 의미다.



 "네. 내 주제는 알고 있으니 다시 주제로 돌아갈 겁니다. 결국 비단뱀이죠. 비단뱀은 탈피하지만 항상 다시 시작합니다. 그렇게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요. 새로 거듭나지만 조금 더 새로워질 뿐 똑같은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다른 식으로 관통해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프로그래밍해야 하죠. 가장 성공하기 쉬운 방법은 의외의 결과가 나오도록 타인이 타인을 프로그래밍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해서 신문에 난 걸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텍사스의 한 정원에 반점이 나타났지요. 그런 것이 사람들 눈에 뛴 것은 처음이었고 나도 희망에 차서 흥분했지만 그것은 사라져버렸습니다......" 74쪽.


-타인이 타인을 프로그래밍한다는 것은 아마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쥐를 무더기로 사세요. 알아보기 힘들어질 겁니다. 생쥐를 하나씩 인식하니까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개성이 생기는 거지요. 개성 없는 다수로 받아들이면 훨씬 인상이 희미해질 겁니다. 84쪽.


그때 찰리 채플린의 슬픈 희극처럼 가난하고 불안에 떠는 숫자 1은 애처로워진다. 나는 1이라는 숫자를 볼 때마다 도망치게 해주고 싶다. 1은 부모가 없어 고아원에서 혼자 자랐고, 뒤에서는 줄곧 0이 쫓아와 따라잡으려 하고 앞에서는 큰 수들의 마피아가 모두 그를 노리고 있다. 1은 난자가 없어 수정이 되지 않은 출생 전 증명서와 같다. 그것은 2가 되는 것을 꿈꾸며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늘 제자리이기 때문에 희극이 된다. 93쪽.


-소설의 마지막에 쿠쟁은 0이 된다. 그로칼랭을 동물원에 보내고, 블롱딘을 마담에게 줘버리고, 무생물인 시계를 사와 애정을 나누려 한다. 그는 스스로가 그로칼랭이 되어 산다.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느껴지는 나 자신의 부재 상태를 극복하기만 하면 된다. 정말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프롤로고멘 상태이다. 그 말이 내 상태에 딱 맞는다. '프롤로고멘' 상태에서는 무엇 또는 누군가에 대한 프롤로그가 있어서 희망을 품게 된다. 124쪽.


-이 소설에서는 낙태이야기를 한다. 어떤 평론가는 낙태를 반대하는 소설이라 말하기도 했단다. 뭐, 이 책은 낙태를 반대하고 있긴 하다. 비자연적 행위가 자연적 행위가 됐기 때문이다. 프롤로고멘은 인간 이전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간 이전의 상태, 그 자연의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그걸 묻고 있다. 쿠쟁은 그 프롤로그에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쿠쟁은 자신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하고 0이 된다. 내면에는 잉여가 가득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인간은 곧 의사표현이라는 겁니다. 나는 여기에 외부적인 이유로, 상황 때문에 내면의 벙어리가 된 온갖 사람을 맞아들이고, 그들이 해방되도록 도와줍니다. 내 고객들은 모두 비밀스런 목소리를 부끄러운 듯 숨기고 있습니다. 사회가 금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141쪽.


-은퇴한 연극배우이자 저명한 복화술사 파리지.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대화술 및 복화술을 교육 중에 있음.


 


그들은 내가 외부의 결핍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내부의 잉여 때문에도 괴롭다. 164쪽.



나는 가끔 모든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지만 실제 흘러나오는 대사와 잘 맞지 않는 더빙된 영화 속에 사는 기분이 든다. 촬영 후에 녹음하는 것인데 가끔 녹음이 아주 잘되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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