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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가 없는 작품이다. 장인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고, 클리셰와 문학적 은유-상징이 명확해 답답함을 느낄 만한 부분은 없었다. 긴 러닝타임을 보고 지레 겁먹었지만 불필요한 장면, 대사가 거의 없어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들어내고자 하면 들어낼 수 있는 씬이 있겠으나 시퀀스 전체를 들어낼만한 부분은 없었다. 내 입장에서 단점이라고 짚을 부분은 아니었지만, 대중적 재미와 거리가 멀고 드러내는 설명이 적어 관객이 불만을 토로할 법했다. 좋은 영화지만, 마스터피스라고 하기엔 아쉬움 점이 있다. 




1. '개츠비'에 대한 주목


버닝을 그럴듯하게 해석하려는 시선은 '청년의 분노'에 포커스를 맞춘다. 유아인이 폭발한 건 다른 세계에 사는 '개츠비'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 감독이 현시대를 반영했다는 것이다(그런 평론들 제목만 봤지만). 하지만 빈곤층과 부유층의 대립은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유아인과 스티븐 연이 관객에게 얼굴이 익숙하고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됐다는 게 특별해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의미는 익숙한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이 대립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버닝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틀로 작용하지만, '트리거'는 아니다. 정해진 결말로 가기 위해 포장된 도로쯤 됐을까. 길 위를 걷기만 해선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골인을 하든, 길이 낭떠러지가 되든 마무리가 있어야 한다. 캐릭터를 규정 짓는 빈부의 틀은 다분히 도구적이었으므로 과도한 의미부여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속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영화가 그 '속내'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순 없지만.




2. 돈, 섹스, 순수한 욕망 


버닝 초반의 핵심은 유아인이 섹스를 할 때 지켜봤던 가짜 햇빛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먹고, 보이지 않는 여자와 햇빛을 상상하며 자위하고, 생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려는 여행 모두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본능적인 행위다. '개츠비'를 질투하는 건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돈을 단지 '물질'로만 생각할 수 없다. 생의 질은 돈이 결정하며, 삶의 가치마저도 돈이 결정한다.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생존본능이 돈에 대한 갈망이다. 그건 성욕, 식욕과 다를 바 없다.


유아인이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라진 여자의 집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거짓 욕망들 사이에서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허물을 벗어던질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인간의 극단적 순수함, 피에 잠들어 있던 폭력에 눈을 떳을 때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원작 소설을 봤다면 더욱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겠으나 다른 하루키 소설과 비교했을 때 '욕망'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최근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과거 하루키 소설은 관능적이다. 캐릭터들이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야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다.


감독은 유아인을 의도적으로 멍청하게 그린다. 문성근의 사무실에서 보인 유아인의 행동은 작위적인 모자람이었다. 물들지 않은 '백치'에서 스티븐 연이 준 자극을 받아 각성하는 것, 이게 버닝의 '속내'다. <데미안>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는 느낌이 좀 다르고,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 주인공이 '포식자'로 각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게 표현이 잘 안 됐다. 감독은 유아인의 변화를 집착으로 풀어내며 유아인 외적 요소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서스펜스였겠지만, 유아인에 좀 더 집중했어야 했다. 유아인 내면의 변화를 정밀하게 포착하지 못했고, 굴곡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의 반전을 위해서 아껴둔 것일지 모르지만 버닝은 반전 영화도, 스릴러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온전히 유아인의 본능과 욕망 대한 극적인 드라마여야만 했다.




3. 문명-야만 대립, 제3자들의 갈등


유아인과 스티븐 연은 서로에 대한 관찰자다. 유아인은 어울리지 않는 제3자로 스티븐 연 무리를 관찰한다. 자신들 발 밑에 존재하는 '비닐하우스'를 조롱하고 불태우며 즐거워하는 '개츠비들'. 서슴없이 존재를 무시하고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세계의 '지배자'들을 바라본다 ('파티' 두 시퀀스가 작위적인 반복 연출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영화는 여기서 익숙한 구도를 또 한 가지 사용한다. 도시와 비도시, 문명과 야만. 앞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계급 대립에 해석을 한정시키기 보다는 자주 사용되는 인문학적 도구를 가져다 쓰는 게 영화 버닝에 더 어울린다. 


최근 예술 작품들이 문명보다 자연의 우위를 표현하는 흐름처럼 버닝의 야만은 결국 문명을 찢어 발긴다. 유아인이 또 다른 스티븐 연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봤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열린 의미로 해석하자면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으나). 스티븐 연은 유아인을 바라보는 게 익숙하지만, 유아인은 스티븐 연을 보는 게 낯설다. 캐니와 언캐니는 극과 극이지만 공존한다, 유아인이 낯선 것과 동화되는 게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난 스티븐 연이 태우려고 한 '비닐하우스'가 유아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됐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복잡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탄생했을 텐데.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포식자'로서 동질감을 느낀 다른 그룹의 인간들이 만났을 때의 해체와 생성을 기대했지만, 유아인은 스티븐 연이 자신의 세계에 불쑥 침입해오자 수동적인 방어에 나설 뿐이다.


영화는 너무 손쉽게 '여성'을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체가능한 상징적 여성을 등장시켜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고리를 만들고, 동창생이 사라진 후에도 유아인과 스티븐 연의 고리로 사용한다. 유아인이 동창생에게 드러낸 감정을 어느 시점에선가 내부로 돌려 유아인의 내적 변화에 치중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유아인을 상대하는 스티븐 연도 좀 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졌을 것이다. 무가치, 고립을 상징하는 우물만으로는 캐릭터 심리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다. 우물은 하루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인간의 내면, 내면으로 향하는 통로 정도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영화에서는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관계를 암시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스티븐 연이 캐스팅된 의도가 거기에 있지 않았까 싶다. 스티븐 연은 한국인이지만 이민을 떠난 '외부인'이다. 미국에서도 그는 '외부인'이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제3자'라는 배우의 배경이 사용된 것이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은 사회의 룰을 따르지 않는 인물이다. 허물을 벗기 전 평범함을 상징하는 유아인의 시선에서 그는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 '제3자'다. 외부인이라는 지위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가 영화 내부에서 필요했고, 관객에게도 전달되길 바랐던 게 아닐까. 남한에 살지만 북한 방송이 들리는 경계 위에 서 있던 유아인은 갈등한다. 자신의 세계 밖에 있는 것, 나에게 실존하지 않는 것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이런 흐름은 으레 그렇듯 '파멸한다'는 클리셰로 수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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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끄는 3명은 서로에게 모두 외부인이고, 관찰자다. 그래서 이야기가 깊이 들어가질 못한다. 감독의 의도가 관찰에 있었다면 어쩔 수 없기야 하지만. 엔딩에서 유아인의 살인은 급작스럽고 어설펐다. 그런 방식으로 감정을 터트릴 거란 암시가 별로 없었고, 핸드폰 조회하면 바로 잡힐 살인이 방식이 허술했다. 조금 무리하게 열린 결말로 이끈 듯한 느낌도 받았고, 엔딩 장면에서 유아인의 연기도 디렉션이 명확하지 않았다(롱테이크가 대단히 기막히긴 했다). 이래저래 아쉬웠던 점을 지적하게 됐지만, 네거티브 방식의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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